발기부전치료제구입 [단독] 여당, ‘서민금융안정기금’ 설치법 내놓는다···15%대 고금리 사라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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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길중 작성일25-09-16 08:02 조회1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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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기부전치료제구입 더불어민주당이 이재명 대통령의 금융 분야 공약인 ‘서민금융안정기금’ 조성을 위한 법안을 발의한다. 서민들을 위한 정책금융조차 15%가 넘는 고금리를 취하고 있다는 이 대통령의 비판이 나오면서 서민금융 관련 기금을 법제화하겠다는 것이다.
국회 정무위원회 민주당 간사인 강준현 의원은 서민금융진흥원(서금원)에 서민금융안정기금을 설치하는 내용의 서민금융지원법 개정안을 이르면 11일 발의할 예정이라고 10일 밝혔다.
이번 법안 초안에는 서금원이 기존에 운용하던 ‘서민금융보완계정’과 ‘자활지원계정’을 서민금융안정기금에 편입하는 내용을 담았다. 두 계정은 금융사 출연금과 정부 예산 등을 통해 조성해온 것으로, 저신용자들을 대상으로 한 정책금융 상품의 보증재원이나 취약계층을 위한 소액대출 등으로 활용됐다. 법안은 이 기금을 통합하고 법제화해 금융위의 승인 아래 서금원이 운용하자는 내용이다.
기금 설립을 법제화하면 향후 서민금융을 위한 재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강 의원은 서금원에 지원되던 정부의 출연금은 매년 출연 여부가 결정되고 있어 장기적인 지원 계획 수립이 불가능한 상태라며 신용보증을 통한 정책금융을 지원하는 다른 기관들의 경우, 법에 따라 설치된 기금을 갖추고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금융위는 이번 기금이 저신용자에 고금리를 적용하는 정책서민금융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안이 될 수 있다며 관련 법안 처리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겠다는 방침이다.
현재 서금원이 보증하는 ‘햇살론15’ 등의 상품은 연 15.9% 수준의 금리를 정하고 있다. 위험 부담을 고려해 7~8% 가량의 보증료율이 반영돼 있다. 저소득층에게 정책금융조차 무거운 부담을 지워 신용불량을 양산할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 대통령은 전날 국무회의에서 경제성장률(1%)의 10배가 넘는 15%가 넘는 이자를 주면 서민들이 어떻게 살 수 있나라고 말했다.
안정적 기금 확보를 넘어 실질적으로 저소득자들의 대출 금리 부담까지 내려주기 위해서는 금융사들의 출연요율을 높여 재원 규모를 확충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금융위 관계자는 출연요율과 산정 방식은 서민금융지원법 시행령으로 정한다면서 법안 처리를 전후해 논의가 시작될 수 있다고 말했다.
금융권에선 장기 연체채권 ‘배드뱅크’ 설립에 따른 출연금과 교육세 인상 등 각종 과제가 늘어난 상황이라 당혹감을 보이고 있다. 은행권 한 관계자는 정부로부터 톱다운 방식으로 내려오는 요구들이 점점 많아지니 난감해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금융당국에선 이번 법안이 통과돼도 기금 설립은 이르면 2027년 초에나 가능할 것으로 봤다. 금융위 관계자는 법 개정을 해도 기금운용계획을 수립해야 하는데, 국무회의 의결과 예산편성 일정을 고려하면 2027년에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절망 속에서 일군 모녀의 꽃밭
■인간극장(KBS1 오전 7시50분) = 20여년간 미국에서 홀로 두 아들을 키우며 고된 이민 생활을 했던 정데레사씨는 5년 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3년 전, 미국에 있는 큰아들이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데레사씨의 삶은 무너졌다. 절망과 우울에 빠진 데레사씨는 어머니와 함께 경북 영천의 깊은 산골로 들어갔다. 지금은 꽃농사를 지으며 마음의 안식을 찾아가고 있는 데레사씨의 꿋꿋한 삶을 만나본다.
핀란드 새댁 생애 첫 섬마을 여행
■한국기행(EBS1 오후 9시35분) = 핀란드에서 온 밤비씨는 한국의 매력에 푹 빠져 한국에서 결혼한 뒤 한국 문화를 다양하게 경험하고 있다. 이번에는 생애 첫 섬 여행에 홀로 나선 밤비씨. 목포에서 서쪽으로 약 6㎞ 떨어진 섬 외달도로 향한다. 서른 명 남짓한 주민들이 사는 이 작은 섬에는 20년 된 한옥 민박집이 있다. 밤비씨는 이곳에 머물며 난생처음 낚시와 미역 채취를 해보는 등 섬살이에 도전한다.
2022년 10월29일 토요일 밤, 평범한 비번일이었다. 오랜만에 서울 용산구 이태원 해밀톤 호텔 뒤편 외삼촌 댁을 찾았다. 어린 시절 자주 찾아 골목마다 길을 훤히 알고 있었다. 외삼촌 댁을 나왔을 땐 골목마다 사람이 넘쳐났다.
지난 4일 서울 강서구 서울소방 특수구조단 119항공대에서 만난 서강윤씨(38)는 그날 밤을 이렇게 기억했다.
서씨는 해밀턴호텔 옆 골목으로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사람이 너무 많았다. 겨우 인파를 뚫고 다른 골목으로 돌아서 나왔다. 휴대전화 배터리가 2%밖에 남지 않았다. 길 건너 카페에 들어가 음료를 시키고 충전을 맡겼다. 그때 길 건너편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사이렌도 어렴풋이 들리자, 서씨도 그 소리를 찾아 뛰어나갔다.
골목에는 수백명이 몰려 밀리고 넘어지면서 서로를 누르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미 넘어져 귀만 보였고, 누군가는 상반신만, 다른 누군가는 인파에 파묻혀 손만 겨우 뻗고 있었다. 날카로운 비명과 묵직한 클럽 음악, 고통스러운 신음과 번쩍이는 조명. 골목의 모든 게 비현실적이었다.
서씨는 응급구조학과를 나와 2015년 소방관이 된 구급대원(현 소방장)이었다. ‘100명을 구하자’는 당찬 마음으로 소방관이 된 그는 당시 8년차 대원이었다. ‘다수 사상자 교육’에 교관으로 참여한 적도 있었다. 중증 환자를 구조해 정상 생활로 돌아오면 주어지는 각종 ‘세이버’ 인증서도 수차례 받았다. 그러나 그에게도 눈앞에 닥친 상황은 낯설기만 했다.
비번 중인 구급대원입니다! 현장 지휘관에게 말하고 바로 구조에 참여했다. 출동한 구조대원, 경찰관, 시민들이 함께 급한 대로 넘어진 사람들을 들어봤다. 처음엔 몇 사람을 겨우 빼냈다. 하지만 이후엔 여럿이 달려들어 깔리고 끼인 이들을 당겨보고 들어봐도 꿈쩍하지 않았다.
살려주세요. 엄마한테 출장용접 전화 좀 해주세요. 제 이름을 기억해주세요. 여기저기서 절규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만 기다리면 구해줄게요. 이따 직접 전화해요. 서씨는 그들을 안심시키려고 말했다. 한 사람씩 겨우 빼낸 뒤 CPR(심폐소생술)을 하고 병원 이송을 도왔다.
그런 약속을 하지 말 걸 그랬어요. 서씨는 ‘구해주겠다’고 한 말을 후회했다. 이날 그 골목에서 158명이 숨졌다. 눈앞에서 의식이 흐려져 가는 모습을 그는 처음부터 지켜봤다.
무력감에 사로잡힌 그에게 한 동료가 ‘비번이니까 일단 들어가라’고 했다. 잊고 온 휴대전화를 챙기고 주차한 차를 찾아 집에 갔다. 입었던 갈색 코트는 어딘가 사라졌다. 니트 상의는 이곳저곳 찢기고 검붉은 얼룩이 묻었다. 휴대전화엔 부재중 전화 기록이 쌓여있었다. 부모님을 안심시키고 씻지도 못한 채 쓰러지듯 누웠고, 다음날 평소처럼 출근했다.
그날 이후 뉴스에는 서씨의 뒷모습이 자주 등장했다. 며칠 후 서울시청 광장에 차려진 시민분향소를 홀로 찾았을 때 그는 ‘살려달라’고 했던 이들과 다시 마주했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잠 못 드는 날이 많아졌다.
서씨에게 죽음은 어쩌면 익숙한 것이었다. 사건·사고가 벌어지면 늘 현장에 가는 것이 그의 일이다. 망자와 눈을 맞추고, 손으로 만지며 모든 감각으로 죽음을 느낀다. 가까스로 생명을 이어가던 환자가 끝내 살아나지 못 하는 일도 빈번하다.
구급대원으로 일하면 심정지 환자 대부분을 구하기 어려워요. 선진국에서도 10% 정도 확률로 소생해요. 그는 자신의 앞에서 사망한 이들이 이태원 참사를 제외하고도 400명은 될 거라고 했다.
서씨 뿐 아니라 현장에 출동한 소방관과 경찰관들이 모두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도 이태원 참사는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일이었고 큰 영향을 미쳤다. 이태원 참사 때 현장에 출동해 트라우마를 겪다 최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소방관도 있었다.
서씨는 매일 같이 인터넷을 뒤져가며 ‘군중 유체화’(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이 밀집해 개인 의지와 상관없이 물처럼 떠밀려 다니는 현상)와 같은 다중밀집사고를 분석한 논문과 국내외 사례를 닥치는 대로 찾아봤다.
‘무엇을 제대로 못 했을까. 혹시 내가 뭘 잘못한 것은 아닐까. 이렇게 하면 달랐을까.’ 머릿속에 질문인지 자책인지 알 수 없는 물음이 떠나지 않았다. 일단 유체화 현상이 생기고 도미노처럼 넘어지면 구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사전 예방이 중요하다는 게 그가 찾은 연구의 공통점이었다.
힘들고 지친 마음이었지만 늘 강해지려고 했다. 더 많은 사람을 살려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다잡았다. 하지만 때론 약해지고 힘들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다가 그는 동료들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고 했다.
같이 일하던 선배님 중에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 같은 대형 참사를 경험한 분들이 계셨어요. 늘 밝고 강한 분들인데, 가끔 멍하게 있는 모습을 보면서 ‘트라우마가 오래 가는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비번날 갑자기 참사와 마주한 그처럼, 근무 중 출동해 현장에 있던 동료들이 있었다. 요즘 잘 지내냐고 물어보기가 조심스럽더라고요. 괜히 상처를 떠올리게 할까 봐요. 서씨도 그날의 경험을 이야기하길 두려워했다.
서씨가 처음으로 그날의 경험을 공개적으로 이야기 한 건 지난해 11월 열린 제15차 아시아태평양 재난의학회 학술대회에서였다. 비슷한 행사에서 몇 차례 강연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같은 일이 또 벌어지지 않으려면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정책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라도 현장을 경험한 이들이 이야기해주면 좋을 것 같다는 말을 듣고 해보기로 했어요.
서씨는 그렇게 세계 각국에서 온 의사·구조대원 등 재난 전문가들 앞에 섰다. 그는 다중밀집사고에 대한 경험을 담은 발표 자료에 이태원 참사를 기억하라고 영어로 썼다. 그날은 평소와 같은 평범한 날이었다며 자신이 생존자이자 구조자였다고 소개했다.
오랫동안 준비한 발표는 왈칵 쏟아지는 눈물에 계속 중단됐다. 학회에 참석한 해외 학회 회원들이 그에게 다가와 안아줬다. 비슷한 경험을 해봤다며 함께 울어주기도 했다. 공감하고 위로받으니 힘이 된다는 것을 그때 많이 느꼈다고 서씨는 말했다.
잘 지내려고 합니다. 더 많은 사람을 구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도움도 필요합니다. 서씨의 발표 마무리 인사였다.
서씨는 그 다짐을 실천하고 있다. 이태원 참사 이후 그는 오랫동안 준비한 서울소방 특수구조단 119항공대에서 항공구조구급요원으로 일하고 있다. 산과 바다를 헬기로 다니며 사람을 구한다. 번개가 치고 바람이 불고 안개가 끼는 날에도 함께 출동한 동료를 믿고 로프를 붙잡은 채 헬기 아래로 뛰어내린다.
그는 참사로 인한 구조대원들의 트라우마에 깊은 관심을 두게 됐다. 미국의 9·11테러 같은 상황을 경험한 이들도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트라우마가 발현하는 일이 있어요. 그는 이태원 참사의 생존자이기도 한 소방관과 경찰관들이 서로 안부를 묻고 자신의 경험에 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저보다도 경력이 짧은 후배들도 당시 현장에 있었어요. 그 친구들에게 ‘힘들지. 나도 힘들다’고 하거나, 농담처럼 ‘마지막까지 살아서 더 많이 살려내자’고 해요. 힘들어하는 이들에겐 구조활동을 잠깐 쉬거나 다른 일을 해도 괜찮다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후배를 잃는 것보다 그게 나은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여전히 힘들 때가 있지만 생명을 구한 보람으로 살아가려고요. 동료들하고 함께 하면서 정년퇴직하는 게 목표에요.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웃었다.
국회 정무위원회 민주당 간사인 강준현 의원은 서민금융진흥원(서금원)에 서민금융안정기금을 설치하는 내용의 서민금융지원법 개정안을 이르면 11일 발의할 예정이라고 10일 밝혔다.
이번 법안 초안에는 서금원이 기존에 운용하던 ‘서민금융보완계정’과 ‘자활지원계정’을 서민금융안정기금에 편입하는 내용을 담았다. 두 계정은 금융사 출연금과 정부 예산 등을 통해 조성해온 것으로, 저신용자들을 대상으로 한 정책금융 상품의 보증재원이나 취약계층을 위한 소액대출 등으로 활용됐다. 법안은 이 기금을 통합하고 법제화해 금융위의 승인 아래 서금원이 운용하자는 내용이다.
기금 설립을 법제화하면 향후 서민금융을 위한 재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강 의원은 서금원에 지원되던 정부의 출연금은 매년 출연 여부가 결정되고 있어 장기적인 지원 계획 수립이 불가능한 상태라며 신용보증을 통한 정책금융을 지원하는 다른 기관들의 경우, 법에 따라 설치된 기금을 갖추고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금융위는 이번 기금이 저신용자에 고금리를 적용하는 정책서민금융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안이 될 수 있다며 관련 법안 처리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겠다는 방침이다.
현재 서금원이 보증하는 ‘햇살론15’ 등의 상품은 연 15.9% 수준의 금리를 정하고 있다. 위험 부담을 고려해 7~8% 가량의 보증료율이 반영돼 있다. 저소득층에게 정책금융조차 무거운 부담을 지워 신용불량을 양산할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 대통령은 전날 국무회의에서 경제성장률(1%)의 10배가 넘는 15%가 넘는 이자를 주면 서민들이 어떻게 살 수 있나라고 말했다.
안정적 기금 확보를 넘어 실질적으로 저소득자들의 대출 금리 부담까지 내려주기 위해서는 금융사들의 출연요율을 높여 재원 규모를 확충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금융위 관계자는 출연요율과 산정 방식은 서민금융지원법 시행령으로 정한다면서 법안 처리를 전후해 논의가 시작될 수 있다고 말했다.
금융권에선 장기 연체채권 ‘배드뱅크’ 설립에 따른 출연금과 교육세 인상 등 각종 과제가 늘어난 상황이라 당혹감을 보이고 있다. 은행권 한 관계자는 정부로부터 톱다운 방식으로 내려오는 요구들이 점점 많아지니 난감해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금융당국에선 이번 법안이 통과돼도 기금 설립은 이르면 2027년 초에나 가능할 것으로 봤다. 금융위 관계자는 법 개정을 해도 기금운용계획을 수립해야 하는데, 국무회의 의결과 예산편성 일정을 고려하면 2027년에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절망 속에서 일군 모녀의 꽃밭
■인간극장(KBS1 오전 7시50분) = 20여년간 미국에서 홀로 두 아들을 키우며 고된 이민 생활을 했던 정데레사씨는 5년 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3년 전, 미국에 있는 큰아들이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데레사씨의 삶은 무너졌다. 절망과 우울에 빠진 데레사씨는 어머니와 함께 경북 영천의 깊은 산골로 들어갔다. 지금은 꽃농사를 지으며 마음의 안식을 찾아가고 있는 데레사씨의 꿋꿋한 삶을 만나본다.
핀란드 새댁 생애 첫 섬마을 여행
■한국기행(EBS1 오후 9시35분) = 핀란드에서 온 밤비씨는 한국의 매력에 푹 빠져 한국에서 결혼한 뒤 한국 문화를 다양하게 경험하고 있다. 이번에는 생애 첫 섬 여행에 홀로 나선 밤비씨. 목포에서 서쪽으로 약 6㎞ 떨어진 섬 외달도로 향한다. 서른 명 남짓한 주민들이 사는 이 작은 섬에는 20년 된 한옥 민박집이 있다. 밤비씨는 이곳에 머물며 난생처음 낚시와 미역 채취를 해보는 등 섬살이에 도전한다.
2022년 10월29일 토요일 밤, 평범한 비번일이었다. 오랜만에 서울 용산구 이태원 해밀톤 호텔 뒤편 외삼촌 댁을 찾았다. 어린 시절 자주 찾아 골목마다 길을 훤히 알고 있었다. 외삼촌 댁을 나왔을 땐 골목마다 사람이 넘쳐났다.
지난 4일 서울 강서구 서울소방 특수구조단 119항공대에서 만난 서강윤씨(38)는 그날 밤을 이렇게 기억했다.
서씨는 해밀턴호텔 옆 골목으로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사람이 너무 많았다. 겨우 인파를 뚫고 다른 골목으로 돌아서 나왔다. 휴대전화 배터리가 2%밖에 남지 않았다. 길 건너 카페에 들어가 음료를 시키고 충전을 맡겼다. 그때 길 건너편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사이렌도 어렴풋이 들리자, 서씨도 그 소리를 찾아 뛰어나갔다.
골목에는 수백명이 몰려 밀리고 넘어지면서 서로를 누르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미 넘어져 귀만 보였고, 누군가는 상반신만, 다른 누군가는 인파에 파묻혀 손만 겨우 뻗고 있었다. 날카로운 비명과 묵직한 클럽 음악, 고통스러운 신음과 번쩍이는 조명. 골목의 모든 게 비현실적이었다.
서씨는 응급구조학과를 나와 2015년 소방관이 된 구급대원(현 소방장)이었다. ‘100명을 구하자’는 당찬 마음으로 소방관이 된 그는 당시 8년차 대원이었다. ‘다수 사상자 교육’에 교관으로 참여한 적도 있었다. 중증 환자를 구조해 정상 생활로 돌아오면 주어지는 각종 ‘세이버’ 인증서도 수차례 받았다. 그러나 그에게도 눈앞에 닥친 상황은 낯설기만 했다.
비번 중인 구급대원입니다! 현장 지휘관에게 말하고 바로 구조에 참여했다. 출동한 구조대원, 경찰관, 시민들이 함께 급한 대로 넘어진 사람들을 들어봤다. 처음엔 몇 사람을 겨우 빼냈다. 하지만 이후엔 여럿이 달려들어 깔리고 끼인 이들을 당겨보고 들어봐도 꿈쩍하지 않았다.
살려주세요. 엄마한테 출장용접 전화 좀 해주세요. 제 이름을 기억해주세요. 여기저기서 절규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만 기다리면 구해줄게요. 이따 직접 전화해요. 서씨는 그들을 안심시키려고 말했다. 한 사람씩 겨우 빼낸 뒤 CPR(심폐소생술)을 하고 병원 이송을 도왔다.
그런 약속을 하지 말 걸 그랬어요. 서씨는 ‘구해주겠다’고 한 말을 후회했다. 이날 그 골목에서 158명이 숨졌다. 눈앞에서 의식이 흐려져 가는 모습을 그는 처음부터 지켜봤다.
무력감에 사로잡힌 그에게 한 동료가 ‘비번이니까 일단 들어가라’고 했다. 잊고 온 휴대전화를 챙기고 주차한 차를 찾아 집에 갔다. 입었던 갈색 코트는 어딘가 사라졌다. 니트 상의는 이곳저곳 찢기고 검붉은 얼룩이 묻었다. 휴대전화엔 부재중 전화 기록이 쌓여있었다. 부모님을 안심시키고 씻지도 못한 채 쓰러지듯 누웠고, 다음날 평소처럼 출근했다.
그날 이후 뉴스에는 서씨의 뒷모습이 자주 등장했다. 며칠 후 서울시청 광장에 차려진 시민분향소를 홀로 찾았을 때 그는 ‘살려달라’고 했던 이들과 다시 마주했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잠 못 드는 날이 많아졌다.
서씨에게 죽음은 어쩌면 익숙한 것이었다. 사건·사고가 벌어지면 늘 현장에 가는 것이 그의 일이다. 망자와 눈을 맞추고, 손으로 만지며 모든 감각으로 죽음을 느낀다. 가까스로 생명을 이어가던 환자가 끝내 살아나지 못 하는 일도 빈번하다.
구급대원으로 일하면 심정지 환자 대부분을 구하기 어려워요. 선진국에서도 10% 정도 확률로 소생해요. 그는 자신의 앞에서 사망한 이들이 이태원 참사를 제외하고도 400명은 될 거라고 했다.
서씨 뿐 아니라 현장에 출동한 소방관과 경찰관들이 모두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도 이태원 참사는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일이었고 큰 영향을 미쳤다. 이태원 참사 때 현장에 출동해 트라우마를 겪다 최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소방관도 있었다.
서씨는 매일 같이 인터넷을 뒤져가며 ‘군중 유체화’(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이 밀집해 개인 의지와 상관없이 물처럼 떠밀려 다니는 현상)와 같은 다중밀집사고를 분석한 논문과 국내외 사례를 닥치는 대로 찾아봤다.
‘무엇을 제대로 못 했을까. 혹시 내가 뭘 잘못한 것은 아닐까. 이렇게 하면 달랐을까.’ 머릿속에 질문인지 자책인지 알 수 없는 물음이 떠나지 않았다. 일단 유체화 현상이 생기고 도미노처럼 넘어지면 구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사전 예방이 중요하다는 게 그가 찾은 연구의 공통점이었다.
힘들고 지친 마음이었지만 늘 강해지려고 했다. 더 많은 사람을 살려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다잡았다. 하지만 때론 약해지고 힘들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다가 그는 동료들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고 했다.
같이 일하던 선배님 중에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 같은 대형 참사를 경험한 분들이 계셨어요. 늘 밝고 강한 분들인데, 가끔 멍하게 있는 모습을 보면서 ‘트라우마가 오래 가는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비번날 갑자기 참사와 마주한 그처럼, 근무 중 출동해 현장에 있던 동료들이 있었다. 요즘 잘 지내냐고 물어보기가 조심스럽더라고요. 괜히 상처를 떠올리게 할까 봐요. 서씨도 그날의 경험을 이야기하길 두려워했다.
서씨가 처음으로 그날의 경험을 공개적으로 이야기 한 건 지난해 11월 열린 제15차 아시아태평양 재난의학회 학술대회에서였다. 비슷한 행사에서 몇 차례 강연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같은 일이 또 벌어지지 않으려면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정책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라도 현장을 경험한 이들이 이야기해주면 좋을 것 같다는 말을 듣고 해보기로 했어요.
서씨는 그렇게 세계 각국에서 온 의사·구조대원 등 재난 전문가들 앞에 섰다. 그는 다중밀집사고에 대한 경험을 담은 발표 자료에 이태원 참사를 기억하라고 영어로 썼다. 그날은 평소와 같은 평범한 날이었다며 자신이 생존자이자 구조자였다고 소개했다.
오랫동안 준비한 발표는 왈칵 쏟아지는 눈물에 계속 중단됐다. 학회에 참석한 해외 학회 회원들이 그에게 다가와 안아줬다. 비슷한 경험을 해봤다며 함께 울어주기도 했다. 공감하고 위로받으니 힘이 된다는 것을 그때 많이 느꼈다고 서씨는 말했다.
잘 지내려고 합니다. 더 많은 사람을 구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도움도 필요합니다. 서씨의 발표 마무리 인사였다.
서씨는 그 다짐을 실천하고 있다. 이태원 참사 이후 그는 오랫동안 준비한 서울소방 특수구조단 119항공대에서 항공구조구급요원으로 일하고 있다. 산과 바다를 헬기로 다니며 사람을 구한다. 번개가 치고 바람이 불고 안개가 끼는 날에도 함께 출동한 동료를 믿고 로프를 붙잡은 채 헬기 아래로 뛰어내린다.
그는 참사로 인한 구조대원들의 트라우마에 깊은 관심을 두게 됐다. 미국의 9·11테러 같은 상황을 경험한 이들도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트라우마가 발현하는 일이 있어요. 그는 이태원 참사의 생존자이기도 한 소방관과 경찰관들이 서로 안부를 묻고 자신의 경험에 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저보다도 경력이 짧은 후배들도 당시 현장에 있었어요. 그 친구들에게 ‘힘들지. 나도 힘들다’고 하거나, 농담처럼 ‘마지막까지 살아서 더 많이 살려내자’고 해요. 힘들어하는 이들에겐 구조활동을 잠깐 쉬거나 다른 일을 해도 괜찮다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후배를 잃는 것보다 그게 나은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여전히 힘들 때가 있지만 생명을 구한 보람으로 살아가려고요. 동료들하고 함께 하면서 정년퇴직하는 게 목표에요.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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