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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7월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년비 2.7%···근원지수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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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길중 작성일25-08-14 08:19 조회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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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노동부는 7월 미국 소비자물가지수(CPI)가 전년 동월 대비 2.7% 상승했다고 12일(현지시간) 밝혔다. 이는 지난 6월(2.7%)과 동일한 수준이다. 한 달 전과 비교해선 0.2% 상승했다.
변동성이 큰 에너지·식품을 제외한 근원 CPI는 전년 동월 대비 3.1%, 전월 대비 0.3% 각각 상승했다. 근원지수의 전년 대비 상승률은 6월(2.9%) 대비 올라 지난 2월 이후 5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부과에 따른 가격 상승 압력으로 7월 들어서도 근원지수를 중심으로 인플레이션 반등세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모습이다. 앞선 6월 소비자물가 지표에서는 장난감, 의류 등 수입 비중이 높은 일부 품목의 가격이 상승한 바 있다.
7월 들어서도 햄(3.7%), 토마토(3.3%), 유아·아동 의류(3.3%), 커피(2.2%) 등 일부 세부 품목의 전월 대비 가격 상승률이 높았다. 휴가철을 맞아 항공료는 전월 대비 4.0% 올랐다.
뉴욕타임스(NYT)는 기업들이 관세로 인한 비용을 소비자들에게 전가하고 있다는 분명한 신호를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식품 전체로는 가격이 전월 대비 보합에 머물렀고, 에너지 가격이 전월 대비 1.1% 내리면서 전체 대표지수 물가 상승률을 제약했다. 임대료 상승 둔화와 유가 하락이 관세에 따른 물가 상승 압력을 일부 상쇄했다고 AP 통신은 전했다.
경제 전문가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관세 부담의 대부분이 소비자에게 전가될 것으로 보고 있다. 골드만삭스 추정에 따르면 현재까지는 외국 제조사가 14%, 소비자가 22%, 미국 기업이 64% 부담하고 있지만, 올 가을에는 소비자 부담이 67%까지 늘어날 수 있다.
모건스탠리 미국 수석 이코노미스트 마이클 가펜은 “우리는 이제 막 전가 효과를 목격하기 시작했다”며 “앞으로 이런 효과가 더 많이 나타날 것으로 예상한다”고 월스트리트저널에 말했다.
근원지수 반등에 따른 우려에도 불구하고 7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깜짝 반등’ 없이 전반적으로 예상 수준에 머물면서 금융시장도 안도하는 분위기다.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9월 중 기준금리를 인하할 것이란 기대도 상승했다. 시카고상품거래소(CME)의 페드워치에 따르면 금리선물 시장은 연준이 9월 통화정책 회의에서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하할 확률을 이날 오전 94%로 반영했다. 전날보다 8%포인트 오른 수치다.
전통시대의 모든 이미지는 주술적인 도상들이고 신화나 종교, 지배계급의 이념이라는 특정 텍스트에 기생하는 그림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이미지는 특정 맥락 속에서 이야기를 전달한다. 사회 구성원들은 그 이야기를 구전하고 기록하면서 역사와 문화를 일구었고 삶을 지탱했다. 한국의 근대 이전 그림, 다시 말해 조선시대까지의 그림이란 특정 시대의 세계관, 신화와 종교, 정치적 이념들이 겹을 이루며 포개진 것의 표상화인데 무속화·불화·산수화·사군자·민화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전통사회가 붕괴하고 일제강점기를 통해 서구 문물이 유입되면서 이전의 서사와 도상들은 소멸해갔다. 근대 이후 미술은 미술 내적인 담론을 거론하거나 지극히 개인적인 텍스트에 기반하면서 공통된 서사로부터 이탈했다. 근대에 들어와 특정 텍스트에서 해방된 이미지는 이제 순수한 감상을 위한 시각적 이미지가 됐다. 순수미술, 현대미술은 공동체가 아니라 철저한 개인의 문제로 환원된다. 이로 인해 실용적 도구이자 수공예로부터 예술의 구분이 이루어졌고, 이전 시대에 만들어진 것들이 새삼 ‘예술 작품’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지금 박물관에 소장된 모든 유물은 본래의 맥락에서 벗어나 순수 전시 가치로 변질된 것들이다. 특정 장소에서 모종의 이야기를 구현하던 이미지들이 탈장소화, 탈맥락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전시장으로 이동하고 해당 텍스트는 망실됐다. 그러니 그 문맥을 모르면 온전한 작품의 이해는 요원하다.
최근 우리 민화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높아졌고 이를 모방하는 미술인의 숫자가 팽창하고 있다. 더구나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인기에 힘입어 까치와 호랑이 배지와 같은 굿즈를 수집하기 위한 관람객이 국립중앙박물관 앞에 장사진을 치고 있다고 한다. 이런 현상은 이례적이다.
그런데 그 작호도(鵲虎圖·까치와 호랑이를 그린 민화)란 과연 무엇인지 아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문맥에 대한 이해 없이 이미지만 소비되는 현상은 아닐까? 전통이 박제화, 사물화, 키치화의 과정을 겪는 것은 아닐까? 민화에 대한 관심은 소중하지만 그것은 우리 민족의 원형을 이루는 텍스트에 대한 이해를 동반하면서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우리 조상들, 즉 동이족에게 새는 조상신·수호신이자 지상계와 천상계를 연결하는 영매였다. 새를 토템으로 한 동이족은 삶의 곳곳에 새 이미지를 안겼다. 새는 하늘의 소식도 안긴다. 까치는 하늘의 기쁜 소식을 알리고 호랑이는 삿된 기운을 몰아내주기에 한 쌍으로 작호도가 그려진다. 까치는 민간의 길흉화복을 주관하는 서낭신의 심부름꾼으로도 알려져 있다. 호랑이는 예로부터 나쁜 귀신을 씹어 먹는다고 전해온다. 귀신을 막아주고 착한 사람을 도와주는 영물로 인식됐다. 양(陽)의 동물인 호랑이는 음(陰)의 존재인 귀신과 도깨비를 능히 잡아 후려치고 부러뜨리며 깨물어 먹을 수 있다고 했다. 이 그림을 앞에 두고 소원성취를 간절히 희구하면서 사악하고 못된 귀신들과 싸우며 착하게 살아온 것이 우리 조상들이란 얘기다.
한국 문화의 원형이 민화 안에 고스란히 잠복해 있으니 조선의 민화란 결국 한국인의 심성, 신화와 종교, 가장 인간적인 소망과 기복 신앙적인 성격이 오롯이 담긴 소중한 텍스트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그러한 문맥의 이해가 동반되는 동시에 민화의 뛰어난 회화적 특성에 대한 인식이 함께 이루어졌으면 하는 것이다.
11일 서울의 한 대형마트 라면 판매대에 안성탕면 등 봉지라면이 진열돼 있다. 지난달 먹거리 물가가 1년 만에 가장 많이 올라 서민 부담이 커지고 있다.
<연합뉴스>
‘내시(환관·내관)의 별장인 성북동 별서 화재.’ 얼마전 서울 소재 문화유산(명승)인 ‘성북동 별서’ 내 목조 건물인 송석정에서 불이 났다.
이 화재로 ‘성북동 별서’의 전체 영역 중에 1953년에 신축된 송석정의 일부(3분의 1)가 파괴되었다.
‘성북동 별서’가 어떤 유산일까. 1992년 ‘성락원’이라는 이름으로 ‘사적’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재분류된 유산이다.
사적 지정 당시 이 별서의 주인공은 ‘환관’이 아니었다.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별장→의친왕 이강(1877~1955)의 별궁’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2019년 심각한 결격 사유가 드러났다. ‘이조판서 심상응’이 사료에 등장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이 뒤늦게 확인됐다.
■‘문인 내시’의 별장
명승 지위가 졸지에 박탈될 운명에 놓였다. 그러나 여기서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성락원이 고종(1863~1907)의 호종 내관인 황윤명(1848~?)의 별서(별장)였다는 사실이 새롭게 확인된 것이다.
‘내시’ 황윤명은 왕실, 그 중 중궁전에 속한 승전색(承傳色·왕 및 왕비의 명을 전달하는 내시 가운데 최고위직)이었다. 명례궁 대차지(종1품)를 역임했다.
명례궁은 중궁전에 속해 궁중의 주방에 식재료를 공급하는 기관이다. 그 업무를 총괄한 핵심인물이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황윤명은 ‘시서화삼절(詩書畵三絶)’로 칭송받은 ‘문인 내시’였다. ‘육교시사’(1870년대 후반 위항 문인의 모임)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황윤명의 글씨는 위창 오세창(1864~1953)의 <근묵>에 실려있고, 역대서화가의 평전인 <근역사화징>에도 이름이 올라있다.
황윤명은 중국과 조선의 명적을 모아 <난운관법첩> 3책을 목판으로 간행했다. 내시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문집(<춘파유고>·1983)이 간행됐다. 황윤명은 공립학교인 삼산의숙까지 설립한 인물이다.
■명성황후 피란지
‘성락원’은 어떻게 내관 황윤명의 별서로 특정됐는가. 성락원의 영벽지 서측 바위에 새겨진 시가 결정적인 증거다.
이 시가 황윤명의 문집인 <춘파유고(春坡遺稿)>에 수록된 시문과 정확히 일치했다.
“온 시냇물 모아 흐르지 못하도록 막고서(百川會不流) 연못 만들어 푸른 난간 둘렀어라(爲沼碧欄頭)…”
중국 고사에 출전이 없는 고유 창작시니, 영벽지의 시는 황윤명의 작품이 확실한 것이다.(이원호 국립문화유산연구소 학예연구사)
‘명성황후의 피란’은 팩트인가. 명성황후(1851~1895)는 1885년 12월21일 황윤명 등 3명에게 ‘일편단충(一片丹忠)’이라는 유묵을 써서 하나씩 나눠준 바 있다. 그런데 이화여대 박물관이 소장한 ‘일편단충’에 ‘황후의 황윤명 별서 피란 사실’이 기록돼있다.
“(갑신정변 발발) 다음 날…액례(내시부 소속 하급관리) 5~6명이 어가를 호위해 혜화문으로 나가 성북동 황윤명 집으로 향했다…쌍류동으로 따라갔다…태후, 왕비, 세자께서 머무르고 있었다…”
이에따라 ‘명승 성락원’은 ‘명승 성북동 별서’로 명칭만 바꾸고 문화유산의 지위를 유지했다.
■내시계의 악인
내시가 어떤 대우를 받았던가. ‘기능을 잃은 존재’로 치부되어 온갖 손가락질을 받고 희화화되었다.
또 군주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온갖 악행을 저지른 음모의 화신으로 여겨졌다. 심지어 ‘내시=비인류’로 치부됐다.
“내시는 더럽고 흉측하니 인류가 아니다. 그런데도 가정을 이루고 산다. 아내가 혹 다른 남자와 접촉이 있을 때 유부녀의 잘못으로 죄를 주니 어찌 천리와 인정에 합당한 것인가….”(<송와잡기>)
물론 내시 중에는 악인이 분명 있었다. 대표주자가 고려 의종(1146~1170) 시대 환관인 정함이다. 정함은 의종의 유모를 아내로 삼는 등 의종의 최측근임을 과시했다.
그는 내시로는 처음으로 내전승반(정 7품)의 벼슬을 받았고, 임금이 하사한 서대(1품 이상 고관이 차는 무소 뿔 허리띠)를 차고 다녔다. 또 대궐의 동남쪽 30보 안에 200칸이 넘는 저택에서 호화생활을 즐겼다. <고려사>는 “우뚝 솟은 저택의 누각은 마치 궁궐 같았다”면서 “이처럼 법을 어지럽힌 환관은 듣도 보고 못했다”고 탄식했다. 정함은 문신 김존중(?~1156) 등과 결탁해서 매관매직을 일삼고 아부하는 자를 등용했다.
1156년(의종 10) 등창을 앓고 누운 정함을 문병하는 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사람들이 그 장면을 보고 “국권이 환관에게 돌아갔구나!”(<고려사절요> 1156년조)라고 수근댔다. <고려사>의 사관은 “환관 정함 등의 농단이 결국 정중부(1106~1179)의 무신란(1170)을 초래했다”고 꼬집었다.(<고려사절요> 1157년조)
■‘내시 명필’
그러나 정함 같은 내시만 있는 것은 아니다. 황윤명처럼 글씨도 잘 쓰고 학식이 뛰어난 내시도 있었다. 그럴만도 했다. 내시부에 소속된 내시(환관)들은 <논어>·<맹자> 등 사서와, <소학>, <삼강행실> 등을 공부하지 않으면 승진할 수 없었다.
대표적인 예가 ‘내시명필’ 이봉정(생몰년 미상)이다. 이봉정이 모신 선조(1567~1608)는 ‘임진왜란을 초래한 암군(暗君)’이라는 혹평에 시달리지만 ‘서예’에서 만큼은 높은 평가를 받는 군주다.
그런데 이봉정은 선조의 붓과 벼루를 받들다가 임금의 필법까지 모방했다.
영의정 이준경(1499~1572)이 “내시인 네가 감히 어필(임금의 서법)을 모방하는가…고치지 않으면 자칫 중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 꾸짖었다. 깜짝 놀란 이봉정이 서법을 송설체(원나라 명필 조맹부의 필체)로 바꾸었다. 선조도 이봉정의 바뀐 필법을 보고 크게 기뻐했다.(<공사견문록>)
선조는 임진왜란 중에 직접 지은 어제시를 이봉정에게 내리기도 했다.
“…간곡히 이르노니 직무에 힘쓰고(丁寧寄語須勤職) 나의 말 저버리지 말고 실천하게.(莫負吾言更體哉)(<인조실록> 1648년 윤 3월17일)
이봉정이 선조의 총애를 받은 이유가 또 있었다. 선조는 임진왜란 직후 의주 피란 당시의 상황을 소개하면서 이봉정의 숨은 공을 밝혔다.
“과인이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는 문제를 두고 깊은 고민에 빠졌을 때 시중 들던 이봉정이 ‘시세가 급하니 중국에 원병을 청해야 한다’고 적극 주선했다. 그래서 비변사에 명을 내려 의논하게 한 결과 의견이 합치됐다.”(1604년 3월23일)
이봉정은 광해군 연간에도 활약했다. 광해군이 “넌 선조 때는 매우 여위었는데, 지금은 살찌고 건강하다.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봉정이 답했다.
“모두가 전하(광해군)의 은혜 덕분입니다. 선조 때에는 너무도 부지런히 정사를 펼쳐서 저 같은 무리가 여위었지만 지금은 여유있게 일하니 이렇게 살이 찐 것입니다”고 대답했다.(태천잡기>)
얼핏 들으면 아부 같지만 곱씹어보면 ‘광해군, 당신은 부왕(선조)보다 정사에 게을리한다’는 날카로운 풍자였다.
■반학영(반하경)의 할복 순국
특히 필자의 심금을 울린 인물이 있다. 내시 반학영(이명 반하경·?~1910)이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우국지사다.
전남 장성 출신인 반학영(반하경)은 1840년생으로 추정된다. 어려서 양자로 입양되어 경기 파주 교하리로 이주했다. 그는 철종-고종-순종 등 3대에 걸쳐 승전색을 역임했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스스로 사퇴한 뒤 경기 파주에 은거했다. 그러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통분을 참지 못했다.
그는 양숙부 홍택주를 찾아 “평생 임금의 은혜를 입고 살아온 내가 나라가 망했으나 할 수 있는 일도 없으니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하겠다”라고 하면서 결별을 고했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파주 삽다리 장터에 이르러 “비록 내시의 신분이지만 나라가 망했는데, 어찌 따뜻한 방에서 죽을 수 있겠는가”면서 대로변에서 할복으로 순국 했다. 반학영이 장터 게시판에 한 장의 유서를 걸었다.
“대대로 나라의 녹을 받는 신하였으니 어찌 다른 임금을 섬기리오. 내가 배를 갈라 민영환(1861~1905)과 여러 충신과 함께 지하에서 27대 군왕을 섬길 것이니, 이천만 동포는 혈심(血心)으로 단결하여 충성을 본받으라.”
■궁문에 걸린 김순손의 머리
희대의 폭군인 연산군에게 죽음을 무릅쓴 충간을 서슴지않은 두 내시가 있었다. 환관 김순손(?~1504)과 김처선(?~1505)이다.
김순손은 연산군(1494~1506) 연간에 왕명을 전달하는 승전색으로 일해왔다. 그런데 연산군 즉위 후 1년 만에 사달이 일어났다.
연산군이 “김순손을 의금부에 하옥하여 곤장 100대를 치고 지방 군대에 편입시키라”(<연산군일기> 1495년 6월29일)는 엄명을 내렸다.
그때 연산군은 처벌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훗날 <연산군일기>가 산발적으로 밝힌 사건의 전모가 낯뜨거웠다.
연산군이 암말과 수말을 궁궐 안채(내정·內庭)까지 끌어들여 교미 장면을 구경하고 온갖 난잡한 행위를 일삼았다는 것이다.
그 때는 부왕(성종)의 초상(장례식)이 끝나기도 전(1495년)이었다. 김순손은 이와같은 연산군의 난행에 ‘아니되옵니다’를 외쳤다.(<연산군일기> 1496년 5월13일) 그 뿐이 아니었다.
김순손은 술에 취한 연산군이 선왕(성종)의 후궁을 간음하려 하자 “안됩니다”라고 말렸다.(<연산군일기> 1504년 3월12일)
김순손을 제주도로 쫓아낸 연산군은 “환관으로서 정치에 간여했고, 임금을 업신여긴 김순손을 제주도 현지에서 처형하라”(1496년 5월13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승정원과 3사(홍문관·사헌부·사간원·승정원)가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극형에 처할 죄를 지었다 해도 마땅히 서울로 압송해서 그 죄를 밝힌 뒤 처형해야 한다”고 입을 모아 반대했다.
연산군이 김순손을 서울로 압송하지 않고 굳이 ‘제주도 현지 처형’을 주장한 이유가 있다. 김순손이 ‘입에 담을 수 없는 연산군의 난행’을 적나라하게 진술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연산군의 뒤끝이 결국 작렬했다. 연산군은 갑자사화의 피바람 속에서 제주에 안치되어 있던 김순손을 참형에 처했다.(1504년 3월30일) 연산군은 김순손의 머리를 단봉문(창덕궁의 문)에 두고 내시들에게 보인 뒤 내시부에 간직하게 했다.(4월13일)
■“김처선의 처(處)자도 쓰지 마!”
환관 김처선은 성종의 총애를 받아 정2품(판서급) 자헌대부에 올랐던 인물이다.
그러나 김처선의 운명은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급전직하한다. 연산군이 무오사화(1498)-갑자사화(1504)를 일으키면서 대대적인 살육에 나섰다. <연산군일기> 1505년 4월1일자 기사가 눈길을 끈다.
“연산군이 궁중에서 술에 몹시 취해서 임금을 꾸짖은 환관 김처선을 죽였다”는 것이었다.
‘임금을 꾸짖었다’는 그 내용은 무엇일까.
“김처선은 어둡고 음란한 연산군에게 매번 정성을 다해 간언했다. 연산군은 노여움을 속에 쌓아두고 있었다. 급기야 임금이 궁중에서 처용놀이를 했는데 음란함이 지나쳤다.”(<소문쇄록>)
1505년 4월1일이었다. 역시 거나한 술자리가 벌어졌고, 작심한 김처선이 독설을 퍼부었다.
“늙은 놈이 네 분 임금을 섬겼지만, 고금에 전하와 같은 짓을 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연산군이 크게 성을 내며 화살을 쏘았고, 그 화살이 김처선의 갈빗대에 맞혔다. 그러나 김처선은 그치지 않았다.
“늙은 내시가 어찌 감히 죽음을 아끼겠습니까. 전하께서 오래도록 보위에 계시지 못할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연산군이 화살을 더 쏘아 땅에 넘어뜨리고, 그 다리를 끊고서 “일어나 다니라”고 명했다.
“전하께서는 다리가 부러져도 다닐 수 있습니까.”(김처선)
연산군은 김처선의 혀를 자르고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 냈다. 김처선은 죽을 때까지 말을 그치지 아니했다.
연산군은 김처선의 시체를 범에게 주면서 이성을 잃은 후속조치를 남발했다.(<연산군일기> 1505년 4월 4일)
우선 조정과 민간에서 ‘처(處)’ 자는 입밖에 내지도 말라는 명을 내렸다. 예컨대 그 해 과거시험 답안지에 ‘처(處)’ 자를 썼던 유생(권벌)의 합격이 취소되기도 했다. 김처선의 집을 헐고, 연못을 파도록 했으며, 그의 죄명을 돌에 새겨 묻으라는 명까지 내렸다.
심지어 김처선의 이름을 가진 자는 모두 개명하라는 명까지 내린다. 24절기 중 ‘처서(處暑)’를 ‘조서(徂暑)’로 고치기도 했다. 연산군은 ‘입은 화의 문(口是禍之門), 혀는 내 몸을 베는 칼(舌是斬身刀)’이라는 글귀를 나무패에 새겨 내시는 물론 관리들도 차고 다니도록 명했다.(1505년 1월29일)
■고려를 지킨 내시 방신우
고려 시대 내시 중 으뜸은 방신우(1267~1343)다. 원나라의 직접 통치를 받을 운명이던 고려를 구한 인물이다.
경북 상주 출신인 방신우는 충렬왕의 제1비인 제국대장공주(1259~1297)의 시중을 들기 위해 원나라로 갔다. 7명의 황제와 2명의 태후를 섬겼다. 그 덕에 온갖 금은보화와 함께 원나라 강남 지방의 땅 4000무(81만평)를 하사받았다.
충선왕(재위 1298, 1308~1313) 연간의 일이었다. 요양행성(원나라 행정 구역)의 우승상인 홍중희가 “충선왕이 불법을 자행하고 있다”면서 원나라 중서성에 무고하고 “충선왕을 소환하여 저(홍중희)와 대질시키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방신우는 황태후에게 “고려를 배반하고 도망온 홍중희가 거짓사실로 본국(고려)을 전복하려 한다”고 아뢰었다. 결국 홍중희는 무고죄로 곤장을 맞고 유배되었다. 또 한번의 고비가 있었다.
삭방(북방)의 번왕(제후)인 팔려미사라는 인물이 무리를 이끌고 원나라에 귀순했다. 원나라 황실은 그들을 압록강 동쪽에 거주시키려고 하였다. 그때 방신우가 “아니되옵니다”를 외쳤다.
“고려는 땅이 협소하고 산이 많아 농사나 목축업이 불가능합니다. 북방인들이 편안하게 살지 못할 것이며, 동쪽민들을 동요시킬 뿐입니다.”
그 말을 들은 원나라 황제가 “네 말이 옳다”고 여겨 중지시켰다. 그 뿐이 아니었다. 일찍이 원나라가 고려에 행성(원나라 직할지)을 세우려 했다.
그러자 방신우가 황태후를 설득하여 그 계획을 취소시켰다.
■공민왕을 지킨 이강달·안도적
1363년(공민왕 12) 윤3월1일 흥왕사(개경 근처 사찰)에 머무르고 있던 공민왕을 시해하려는 음모가 벌어졌다
이때 공민왕을 지키던 숙위(경호원)가 모두 달아났다. 반란의 무리가 침전에 들이닥치기 직전 환관 이강달이 왕을 업고 창문을 통해 탈출했다. 이강달은 공민왕을 태후의 침실에 숨겼다.
그 순간 공민왕과 용모가 비슷한 환관 안도적이 침대 안에 들어가 누웠다. 반란군은 안도적을 공민왕으로 오인하고 죽였다. 그러나 공민왕의 무사와 함께 흥왕사 반란사건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강달의 활약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1374년(공민왕 23) 9월 자제위 최만생·홍륜이 공민왕을 시해했을 때 이강달은 맨먼저 침전에 들어갔다. 이강달은 온 방이 피바다를 이루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러나 이강달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밖으로 나와 “주상께서는 괜찮다”고 하고는 문을 걸어잠궜다.
왕의 죽음을 철저히 비밀에 부친 이강달은 경복흥(?~1380·이인임(?~1388)·안사기(?~1375) 등을 불러 역적 토벌을 논의했다. 그 덕에 최만생과 홍륜 등은 체포되어 거열형에 처해졌다.
■“사대부가 너만 못하구나!”
내시들의 삶을 살펴보면서 떠오른 실록 기사가 하나 있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6월1일자 기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피란길에 나서자)…명망 진신들이 각자 몸보신에 혈안이 되어…뿔뿔이 흩어졌다…서울~의주에 이르기까지 선조를 따르던 문·무관은 겨우 17명…나머지는 환관 수십명과 어의 허준(1539~1615), 마부, 하급관리 등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천신만고 끝에 의주에 도착한 선조가 내관(내시)에게 말했다. “사대부가 너희들만도 못하구나.”
1910년 국권침탈 뒤 대로변에서 자결 순국한 내관 반학영 선생의 한마디가 심금을 울린다. “비록 내시의 몸이지만 나라가 망했는데 어찌 내가 따뜻한 방에서 죽을 수 있단 말인가.” 히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강호동 농협중앙회 회장이 지난 11일 이재명 대통령이 주최한 한국·베트남 정상 국빈만찬에 참석해 농업 분야 협력 강화 방안을 모색했다.
농협중앙회는 12일 “강 회장이 한국 측 주요 인사 66명 명단에 포함돼 국빈 만찬에 참석했다”며 “지난 수년간 베트남과 맺어온 긴밀한 협력 관계가 반영된 결과”라고 밝혔다.
농협은 2009년 NH투자증권이 베트남에 첫 사무소를 개설한 후 금융·무역·농식품 유통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현지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농협은행은 호치민지점 설립을 추진 중이다. 중앙회는 베트남에 농식품 수출품목을 확대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농협은 협력 강화를 위해 베트남 협동조합연맹(VCA)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018년 양해각서(MOU) 체결 이후 연수 프로그램, 대표단 교류, 농업기술 협력 등 교류를 이어왔다. 국제협동조합농업기구(ICAO)에서도 의장기관으로서 VCA와 함께 글로벌 협동조합 네트워크 구축을 강화하고 있다는 게 농협 설명이다.
농협은 베트남 다문화 가정도 지원해오고 있다. 베트남 다문화 가정을 대상으로 모국 방문을 지원하고, 농촌 정착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농협 관계자는 “이번 국빈만찬 참석은 한국 농협이 지난 수십년간 VCA 등과 교류 협력 관계를 발전시킨 결과”라며 “또 럼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 방한을 계기로 양국 간 협력이 더욱 강화돼 농협은행은 물론 농협의 베트남 내 사업도 한층 탄력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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