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사무소 난기류 만난 관세협상, 한·미 평행선 쟁점 어떻게···고층 시험대 올라선 ‘실용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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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길중 작성일25-09-18 11:04 조회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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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사무소 한·미 관세협상의 후속 협의를 위해 미국을 방문한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14일 귀국했다. 지난 12일 미국 뉴욕에서 이뤄진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과의 회담은 양측의 입장 차만 확인한 채 끝난 것으로 보인다.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에서 일방적 요구를 하는 미국과 이익이 되지 않는 사인을 왜 하느냐(이재명 대통령)는 한국 정부의 입장이 맞서 있는 형국으로 분석된다.
김 장관은 이날 오전 인천국제공항에서 양자 간 협의가 진행 중인 상황이라며 구체적 답변을 피했다. 김 장관은 ‘일본 모델’ 수용을 요구했는지에 대해 일본 모델이라기보다는 어차피 관세 패키지가 있는 상태라고 했다. ‘미국 측 요구를 모두 수용하는 것을 고려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는 모두 수용한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고 했다.
쟁점은 상호관세율을 25%에서 15%로 낮추는 조건과 맞바꾼 것이나 다름없는 대미 투자의 구조와 방식, 이익 귀속 등이다. 미국은 앞서 합의문에 서명한 일본을 예로 들며 ‘달러 직접 투자로, 미국이 지정한 곳에, 이익 90%는 미국에’라는 관점으로 한국을 압박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국익을 지키는 선에서 협상한다는 입장이다.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은 이날 가장 국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영점을 맞추려는 협상 중이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도 지난 11일 기자회견에서 국익에 반하는 결정은 절대 하지 않는다라고 한 바 있다.
우선 대미 투자 구조에 있어 양국 입장이 판이하다. 미국은 한국이 3500억 달러를 특수목적법인(SPC)에 직접 채워 넣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반면, 한국은 직접 투자 비중을 최대한 낮추고 정부 보증으로 채우겠다는 입장이다. 일본은 기축통화국인 데다 달러·엔 통화스와프도 무제한 가능해 대량 외화 유출로 인한 외환위기 가능성이 낮지만, 한국은 사정이 다르다.
투자 대상 선정도 자국이 주도권을 행사하겠다는 미국과 투자 참여 기업이 사업성 검토를 거쳐 할 일이라는 한국의 입장 차가 크다. 투자 후 이익 배분에서도 미국은 ‘투자 원금 회수 이전 반·반, 이후 미국이 90%’로 명시된 일본과의 합의문을 거론하며 이에 준하는 요구를 하고 있다. 앞서 관세협상 타결 직후에도 러트닉 장관은 SNS 엑스에 이익 90%는 미국민에게 간다고 썼는데, 당시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정상적 문명국가에서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느냐고 일축한 바 있다.
지난 4일 미국 조지아주에서 발생한 한국인 대규모 구금 사태도 변수가 됐다. 한국 기업들이 대미 투자를 망설이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미국 현지 투자에 선뜻 동참할 국내 기업을 찾기 힘들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미국이 추진하는 ‘동맹 현대화’라는 개념 아래 주한미군 감축 문제까지 연계시킬 경우 한국의 선택지가 더욱 좁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미국의 요구가 바뀌지 않는 이상 후속 협상은 상당 기간 난항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오는 23일 미국 뉴욕에서 개최되는 제80차 유엔총회가 교착 상태를 풀어줄 실마리를 제공해줄 수 있을지 주목된다. 2차 한·미 정상회담이 성사될 경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선호하는 톱-다운식 해법을 기대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일본·유럽 사례에서 보듯 동맹보다 경제적 이익 개념이 강한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을 더한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본관이 어디냐는 질문에 잠시 눈앞이 하얘졌다. 우물쭈물하니 친구의 아버지가 먼저 요즘엔 성을 묻는 사람이 잘 없지 하고 속을 헤아려줬다. 대체 어른들은 남의 집 족보가 왜 궁금한 걸까? 그게 탐정사무소 어른들한텐 일종의 MBTI 같은 거지. 친구는 자신의 아버지를 변호하듯 멋쩍게 말했다. 나는 친구 아버지가 준 배 한 상자를 트렁크에 실으며 호쾌하게 웃었다. 친구야, <범죄와의 전쟁>에서 최익현(최민식)은 ‘어디 최씹니까?’라는 질문 하나로 주먹 세계의 실세가 됐어. 한국 사회에서 뿌리를 안다는 건 그만큼 강력한 힘인 거야. 참… 난 경주 최씨도 아닌데 이렇게 좋은 배를 받아도 되는 건지…
본관을 알려준 대가로 받은 배는 달고 시원했지만, 남의 족보를 묻는 게 거북하다는 내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경상도 집성촌에서 조선시대부터 대를 이어 살아온 나의 조부모는, 내가 겨우 말을 뗐을 때부터 가문의 큰 인물이 세운 업적들을 읊어주던 분들이었다. 400년 전 죽은 내 조상의 기분까지 알고 싶지 않았던 나는, 하루라도 빨리 그들의 밑에서 탈출하려 안간힘을 썼다. 가문의 영광을 다 왼다 해도 결국 다른 집안의 며느리로 살아갈 미래뿐인 손녀는 그것이 하나도 미안하지 않았다.
종로3가는 정말 좋지 않니. 악기를 든 사람, 영화를 보는 사람, 직장인, 노인, 게이들… 모든 사람이 은은한 수육 냄새를 뒤집어쓰고 어두운 지하상가 밑을 걸어야 하잖아. 나에게 서울이란 영원히 종로다. 열일곱 살이던 2006년엔 박찬욱을 좋아하던 친구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에릭 로메르의 <여름 이야기>를 봤다. 영화가 끝난 후 우리는 밤공기에 취해 넓은 보폭으로 춤을 추듯 걸었다. 바쁘게 종로를 누비는 서울 사람 중 하나가 되어서. 마치 서울의 모든 곳이 우리의 땅이라도 된 것처럼.
밤이 너무 길어
영화 <3670>의 주인공 철준(조유현)이라면 그날 밤 내가 느낀 감정을 알고 있을 것이다. 동성애자인 철준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탈북청년이다. 그는 ‘새터민 장학금’을 주는 교회와 탈북민 모임 등에 참여하며 한국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늘 ‘게이 친구’를 사귀고 싶다는 갈증에 시달린다. 그런 철준에게 종로3가란 진정한 정착을 위한 마지막 관문이자, 황홀한 욕망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혈관 같은 골목마다 촘촘히 뻗어 있는 ‘이쪽’의 공간들이 철준의 눈앞에 펼쳐진다. 데이팅 앱의 알림 소리와 ‘쿵쿵’ 울리는 음악 소리가 심장 박동과 함께 화려한 리듬을 만드는 종로는 아마도 철준이 정착하고 싶었을 바로 그 환상 속 타향이다.
하지만 작심하고 나간 종로 ‘술 번개’에서 철준은 끝내 누구와도 연결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온다. 쓸쓸함에 켠 데이팅 앱에는 ‘탈북민 친구를 찾는다’는 자기소개를 비아냥거리는 메시지만 쌓인다. <3670>은 철준을 통해 타자가 내부로 편입되는 것이 얼마나 사소하고 반복적인 거절들로 이루어지는지, 또 탈북자이자 동성애자라는 이중의 소수자성이 철준의 위치를 얼마나 위태롭게 만드는지를 말하며 그런 철준을 환대하는 인물 영준(김현목)을 통해 그럼에도 ‘나’라는 존재를 부정당한 이들이 어떻게 서로를 돌볼 것인지, 그 연대가 가능한 공간의 조건은 무엇인지를 질문한다.
뿌리가 잘린 사람들
우리는 ‘내부’와 ‘외부’를 어떻게 구분할까? 철준과 내가 서 있던 종로는 그 구분을 밤마다 바꿔 적는 동네였다. 수육 냄새에 내 정체를 감출 수 있는 수상한 은신처로, 환상과 좌절을 모두 맛보게 하는 얄미운 종착지로. 안과 밖을 구분할 수 없는 이런 공간은 뿌리가 잘린 사람들에겐 그 묘한 품을 내어주는 상실감의 고향이다.
가족의 역사를 통해 나를 이해하는 건 인간에게 무척 중요한 실천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뿌리’를 찾는다는 건 곧 타인을 차별할 무기가 되기에, ‘혈통’ ‘출신’, 나아가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언제나 껄끄럽다. 그런 추궁을 즐기는 사람들은 ‘무시해도 될 만한 것’을 구분하고, ‘이익이 되지 않는 정체성’을 자연스레 줄 세운다. 그들에게 인간의 정체성이란 고정된 실체이며, 맥락을 지니지 못하는 텅 빈 개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광장에서, 영사관 앞에서, 명동에서,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댓글에서. 그들은 우리 사회를 함께 이루고 있는 종족에게 멸시를 쏟아내느라, 세상이 얼마나 다양한 뿌리로 얽혀 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세상을 뿌리 없는 조화로 메우기 위해 핏대를 세운다.
인간의 뿌리는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돋아난다. 서로의 흔적을 엮어 매일 새로운 고향을 만들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감히 정착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우리의 지형은 어떻게 달라질까?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네 땅으로 돌아가라’를 외치는 사람에게도 그런 이동과 정착의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이겠지.
김 장관은 이날 오전 인천국제공항에서 양자 간 협의가 진행 중인 상황이라며 구체적 답변을 피했다. 김 장관은 ‘일본 모델’ 수용을 요구했는지에 대해 일본 모델이라기보다는 어차피 관세 패키지가 있는 상태라고 했다. ‘미국 측 요구를 모두 수용하는 것을 고려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는 모두 수용한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고 했다.
쟁점은 상호관세율을 25%에서 15%로 낮추는 조건과 맞바꾼 것이나 다름없는 대미 투자의 구조와 방식, 이익 귀속 등이다. 미국은 앞서 합의문에 서명한 일본을 예로 들며 ‘달러 직접 투자로, 미국이 지정한 곳에, 이익 90%는 미국에’라는 관점으로 한국을 압박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국익을 지키는 선에서 협상한다는 입장이다.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은 이날 가장 국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영점을 맞추려는 협상 중이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도 지난 11일 기자회견에서 국익에 반하는 결정은 절대 하지 않는다라고 한 바 있다.
우선 대미 투자 구조에 있어 양국 입장이 판이하다. 미국은 한국이 3500억 달러를 특수목적법인(SPC)에 직접 채워 넣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반면, 한국은 직접 투자 비중을 최대한 낮추고 정부 보증으로 채우겠다는 입장이다. 일본은 기축통화국인 데다 달러·엔 통화스와프도 무제한 가능해 대량 외화 유출로 인한 외환위기 가능성이 낮지만, 한국은 사정이 다르다.
투자 대상 선정도 자국이 주도권을 행사하겠다는 미국과 투자 참여 기업이 사업성 검토를 거쳐 할 일이라는 한국의 입장 차가 크다. 투자 후 이익 배분에서도 미국은 ‘투자 원금 회수 이전 반·반, 이후 미국이 90%’로 명시된 일본과의 합의문을 거론하며 이에 준하는 요구를 하고 있다. 앞서 관세협상 타결 직후에도 러트닉 장관은 SNS 엑스에 이익 90%는 미국민에게 간다고 썼는데, 당시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정상적 문명국가에서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느냐고 일축한 바 있다.
지난 4일 미국 조지아주에서 발생한 한국인 대규모 구금 사태도 변수가 됐다. 한국 기업들이 대미 투자를 망설이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미국 현지 투자에 선뜻 동참할 국내 기업을 찾기 힘들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미국이 추진하는 ‘동맹 현대화’라는 개념 아래 주한미군 감축 문제까지 연계시킬 경우 한국의 선택지가 더욱 좁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미국의 요구가 바뀌지 않는 이상 후속 협상은 상당 기간 난항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오는 23일 미국 뉴욕에서 개최되는 제80차 유엔총회가 교착 상태를 풀어줄 실마리를 제공해줄 수 있을지 주목된다. 2차 한·미 정상회담이 성사될 경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선호하는 톱-다운식 해법을 기대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일본·유럽 사례에서 보듯 동맹보다 경제적 이익 개념이 강한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을 더한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본관이 어디냐는 질문에 잠시 눈앞이 하얘졌다. 우물쭈물하니 친구의 아버지가 먼저 요즘엔 성을 묻는 사람이 잘 없지 하고 속을 헤아려줬다. 대체 어른들은 남의 집 족보가 왜 궁금한 걸까? 그게 탐정사무소 어른들한텐 일종의 MBTI 같은 거지. 친구는 자신의 아버지를 변호하듯 멋쩍게 말했다. 나는 친구 아버지가 준 배 한 상자를 트렁크에 실으며 호쾌하게 웃었다. 친구야, <범죄와의 전쟁>에서 최익현(최민식)은 ‘어디 최씹니까?’라는 질문 하나로 주먹 세계의 실세가 됐어. 한국 사회에서 뿌리를 안다는 건 그만큼 강력한 힘인 거야. 참… 난 경주 최씨도 아닌데 이렇게 좋은 배를 받아도 되는 건지…
본관을 알려준 대가로 받은 배는 달고 시원했지만, 남의 족보를 묻는 게 거북하다는 내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경상도 집성촌에서 조선시대부터 대를 이어 살아온 나의 조부모는, 내가 겨우 말을 뗐을 때부터 가문의 큰 인물이 세운 업적들을 읊어주던 분들이었다. 400년 전 죽은 내 조상의 기분까지 알고 싶지 않았던 나는, 하루라도 빨리 그들의 밑에서 탈출하려 안간힘을 썼다. 가문의 영광을 다 왼다 해도 결국 다른 집안의 며느리로 살아갈 미래뿐인 손녀는 그것이 하나도 미안하지 않았다.
종로3가는 정말 좋지 않니. 악기를 든 사람, 영화를 보는 사람, 직장인, 노인, 게이들… 모든 사람이 은은한 수육 냄새를 뒤집어쓰고 어두운 지하상가 밑을 걸어야 하잖아. 나에게 서울이란 영원히 종로다. 열일곱 살이던 2006년엔 박찬욱을 좋아하던 친구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에릭 로메르의 <여름 이야기>를 봤다. 영화가 끝난 후 우리는 밤공기에 취해 넓은 보폭으로 춤을 추듯 걸었다. 바쁘게 종로를 누비는 서울 사람 중 하나가 되어서. 마치 서울의 모든 곳이 우리의 땅이라도 된 것처럼.
밤이 너무 길어
영화 <3670>의 주인공 철준(조유현)이라면 그날 밤 내가 느낀 감정을 알고 있을 것이다. 동성애자인 철준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탈북청년이다. 그는 ‘새터민 장학금’을 주는 교회와 탈북민 모임 등에 참여하며 한국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늘 ‘게이 친구’를 사귀고 싶다는 갈증에 시달린다. 그런 철준에게 종로3가란 진정한 정착을 위한 마지막 관문이자, 황홀한 욕망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혈관 같은 골목마다 촘촘히 뻗어 있는 ‘이쪽’의 공간들이 철준의 눈앞에 펼쳐진다. 데이팅 앱의 알림 소리와 ‘쿵쿵’ 울리는 음악 소리가 심장 박동과 함께 화려한 리듬을 만드는 종로는 아마도 철준이 정착하고 싶었을 바로 그 환상 속 타향이다.
하지만 작심하고 나간 종로 ‘술 번개’에서 철준은 끝내 누구와도 연결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온다. 쓸쓸함에 켠 데이팅 앱에는 ‘탈북민 친구를 찾는다’는 자기소개를 비아냥거리는 메시지만 쌓인다. <3670>은 철준을 통해 타자가 내부로 편입되는 것이 얼마나 사소하고 반복적인 거절들로 이루어지는지, 또 탈북자이자 동성애자라는 이중의 소수자성이 철준의 위치를 얼마나 위태롭게 만드는지를 말하며 그런 철준을 환대하는 인물 영준(김현목)을 통해 그럼에도 ‘나’라는 존재를 부정당한 이들이 어떻게 서로를 돌볼 것인지, 그 연대가 가능한 공간의 조건은 무엇인지를 질문한다.
뿌리가 잘린 사람들
우리는 ‘내부’와 ‘외부’를 어떻게 구분할까? 철준과 내가 서 있던 종로는 그 구분을 밤마다 바꿔 적는 동네였다. 수육 냄새에 내 정체를 감출 수 있는 수상한 은신처로, 환상과 좌절을 모두 맛보게 하는 얄미운 종착지로. 안과 밖을 구분할 수 없는 이런 공간은 뿌리가 잘린 사람들에겐 그 묘한 품을 내어주는 상실감의 고향이다.
가족의 역사를 통해 나를 이해하는 건 인간에게 무척 중요한 실천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뿌리’를 찾는다는 건 곧 타인을 차별할 무기가 되기에, ‘혈통’ ‘출신’, 나아가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언제나 껄끄럽다. 그런 추궁을 즐기는 사람들은 ‘무시해도 될 만한 것’을 구분하고, ‘이익이 되지 않는 정체성’을 자연스레 줄 세운다. 그들에게 인간의 정체성이란 고정된 실체이며, 맥락을 지니지 못하는 텅 빈 개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광장에서, 영사관 앞에서, 명동에서,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댓글에서. 그들은 우리 사회를 함께 이루고 있는 종족에게 멸시를 쏟아내느라, 세상이 얼마나 다양한 뿌리로 얽혀 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세상을 뿌리 없는 조화로 메우기 위해 핏대를 세운다.
인간의 뿌리는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돋아난다. 서로의 흔적을 엮어 매일 새로운 고향을 만들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감히 정착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우리의 지형은 어떻게 달라질까?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네 땅으로 돌아가라’를 외치는 사람에게도 그런 이동과 정착의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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