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오롱하늘채 정부, 일본에서 ‘사도광산 추도식’ 개최…2년 연속 ‘반쪽’ 추도식
페이지 정보
작성자 이길중 작성일25-11-26 09:46 조회3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정부는 이날 오전 10시 일본 니가타현 사도시에서 사도광산 조선인 희생자를 위한 추도식을 열었다고 외교부가 밝혔다. 유가족 11명과 이혁 주일본 한국대사를 비롯한 정부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추도식은 사도섬에 있는 호텔 내 행사 공간에서 진행됐다.
정부 대표인 이혁 대사는 “지금으로부터 80여년 전 이곳 사도섬에는 조선총독부의 관여 하에 모집, 관알선 및 징용 등의 방식으로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동원돼 강제로 노역해야 했던 많은 한국인 노동자분들이 있었다”라며 노동자들의 명복을 빌었다. 이 대사는 유가족들에게도 깊은 위로와 애도의 뜻을 전했다. 이 대사는 “한국인 노동자들이 느꼈을 부상에 대한 두려움, 외부와 단절된 삶 속에서 비롯된 고립감, 기약 없는 미래가 주는 막막함은 오랜 세월을 거치며 유가족의 마음에도 깊은 아픔과 슬픔으로 남았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한·일 양국이 고통과 아픔의 역사를 함께 기억하며, 협력과 연대의 밝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유가족 이철규씨는 추도사에서 “고인이 되신 부친께서 강제동원돼 힘들게 고생하셨던 이곳 사도광산에 와 보니, 부친의 아픔과 슬픔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부친을 더욱 가깝게 기억하게 된다”라고 했다. 유가족들은 순서대로 개별적으로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다. 유가족들은 추도식 이후 조선인 노동자 기숙사 터를 방문해 헌화했다. 또 조선인 노동자 관련 주요 장소들도 방문했다.
앞서 한·일 정부는 지난해 7월 일본 사도광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합의하면서 매년 조선인 노동자 등을 기리는 공동 추도식을 열기로 했다. 이에 따라 한·일은 지난해 11월 사도시에서 첫 추도식을 개최하려 했으나, 한국 정부는 개최 전날 불참을 결정했다. 일본 측의 추도사 내용에 강제성을 나타내는 내용이 없는 등 무성의한 태도가 이유였다. 이에 한국 정부는 유가족 9명과 함께 별도의 추도식을 현지에서 개최했다.
정부는 올해도 일본이 추도식에서 발표할 추도사 내용에 담길 ‘강제성’ 표현에 합의하지 못하면서 공동 추도식은 무산됐다. 한·일 협의 과정에서 일본 측은 여러 표현을 제시했지만 한국 측이 만족할 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이에 일본 측은 단독으로 지난 9월13일 사도섬에서 추도식을 열었다. 일본 측은 추도사에서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조선인의 강제노동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한국 정부는 공동 추도식이 그 취지에 맞게 열릴 수 있도록 일본 측과 계속 협의해 나간다는 입장이다.
“석굴암은 영원한 걸작이다. 동양문화가 최고조였을 때 그 영기(靈氣)를 살린 신라 사람들이 만들었다.”(야나기 무네요시)
민예운동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의 ‘석굴암 예찬론’이다.(<예술> 1919년 2권 5호) 미술사학자 고유섭(1905~1944)은 “인도를 버릴지언정 세익스피어를 버리지 못한다던 영국처럼, 우리에게는 석굴암이 있다”고 했다.(1934년 10월13일) 극찬이다.
그런데 1960년대 이후 석굴암은 우리에게 어떤 이미지일까. 관람객 처지에서 ‘석굴암’은 건물에 들어가 굴 안에 안치되어 조명을 받고 있는 본존불을 훑고 감상하며 지나치는 그런 존재다. 어둠의 공간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대목에서 아주 근본적인 질문이 터져 나온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석굴암은 김대성(?~774)이 751년 불국사와 함께 창건했고, 23년 후인 774년 김대성 사후에 국가가 그 공사를 마무리했다. 그렇다면 창건 당시의 석굴암이 지금 그대로의 모습일까.
얼마전 2025년 APEC 경주개최 기념 국제학술회의(계명대 주최)가 경주에서 열렸다. 이 학술회의에서 ‘석굴암의 원형’을 짐작케할만한 논문이 몇 편 발표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보는 석굴암은 751~774년 완성된 석굴암이 아니라 1958~64년 사이 대대적으로 수리·복원된 모습의 ‘변형 석굴암’이라는 논문이 여럿 발표됐다. 그렇다면 석굴암의 원형은 어땠고, 또 어떻게 바뀌었을까.
■물고문 당한 석굴암?
“1913~15년 철근 콘크리트로 덮었지만…이듬해 여름부터 큰 비에 젖은 듯 흘러내리며 푸른 이끼가 끼어…이는 동해의 안개와 구름이 굴 내에 침입하여 빠져나길 길을 잃어….”(조선일보 1937년 12월2일)
“…석굴암의 벽면석 뒤에 석회를 두텁게 넣어 굴 내 습기가 가득…조각이 항상 젖어 있다.(동아일보 1948년 10월14일)
일제강점기~해방 후 각 신문을 종합해보면 수십년간 지속적인 ‘물고문’을 받은 석굴암을 고발하고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인 1913~15년의 석굴암 해체 복원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당시의 공사담당자는 콘크리트로 마무리했으니 그만하면 천세에 남으리라고 믿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던 모양….”(조선일보 1937년 12월2일)이라는 것이다.
콘크리트 돔 관련해서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19세기 초 포틀랜드 시멘트 발명 이후 1867년 프랑스에서 철망으로 보강한 콘크리트가 본격적인 ‘콘크리트 공법’의 시작이었다. 따라서 1913~15년 일제가 석굴암 수리공사에 활용한 콘크리트 돔 공사는 당대로서는 첨단기법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신재료로 보수했지만 공사 후 이듬해(1916) 여름부터 사달이 난다.
일제가 씌운 콘크리트 돔 때문에 환기가 되지 않아 전에는 보지 못했던 이슬이 흘러내려 굴 안에 물바다를 이뤘다는 것이다. 그럴만도 하다.
석굴암은 토함산(해발 745m)의 해발 565m 부근에서 동해안의 해풍을 온몸으로 맞서고 있다.
훗날(1962년) 1년간 석굴암의 기상조건을 측정한 결과 365일 중 사흘에 한번씩 비가 내리거나(134일), 안개가 자욱 낀(123일) 것으로 나타났다. 쾌청한 날은 겨우 100일 뿐이었다. 동해 바다에서 불어닥친 비와 습기가 석굴암을 매섭게 공격했다는 뜻이다.
■이중 돔과 기와집
이와 같은 누수와 외기에 따른 석굴암의 훼손 문제가 해방 후에도 계속되자 대규모 수리 복원 공사가 계획됐다.
1958년 8~9월 석굴암 1차 조사단은 현장 조사 후 수리·복원의 방향을 정했다. 우선 “일제 강점기에 씌운 시멘트가 석굴암 창건기~구한말에 이르는 1000년 간의 손상보다 더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다”고 지적했다. ‘악의 근원=일제의 잘못된 시공’으로 규정한 것이다.
그러면서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습기·결빙·먼지 등의 피해를 막기 위해 ‘석굴암의 앞쪽 공간’에 지붕을 씌운다는 것이다, 1961년 9월부터 본격 시작된 수리·복원 공사는 크게 3가지 방침에 따라 진행됐다.(강희정 서강대 동아연구소 교수)
1)일제가 설치한 콘크리트 돔 외에 또 하나의 콘크리트 돔을 추가 설치(2중돔)하고, 2)석굴암 앞쪽 양 측면에 ┗과 ┛자 형태로 굽어 있던 마지막 팔부중(4번째)을 펴서 직선형으로 만들며, 3)그렇게 넓게 확보한 직사각형 공간에 전통 한식 기와집을 설치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보는 석굴암의 구조다. 수리·복원 공사는 2년10개월 만인 1964년 6월 완료된다.
■석굴암 공사의 전제조건
이렇게 1960년대의 석굴암 수리·복원공사의 요체는 ‘물(습기)와의 전쟁에서 석굴암을 보호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때문에 공사 계획 단계(1958)부터 ‘석굴암의 이중 돔과, 앞 공간의 기와집 설치’가 움직일 수 없는 핵심 전제 조건이 되었다.
<석굴암 수리공사 보고서>(1967년 간행)에 흥미로운 구절이 등장한다.
“굴 전실부(석굴암 앞쪽 공간)에 목조 기와집을 어떤 형태로 할지 구상중이었다. 그런데 당시 기술진이 구상하는 건물과 비슷한 석굴 전실(기와집)의 모습이 토기와 회화 등에서 발견되어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니까 석굴암 앞 공간에 원래 목조기와집이 존재했다는 근거를 공사 와중에 찾았다는 의미다. 즉 기와집이 본래 존재한 방증 자료인 ‘토기편’과, 석굴암을 그렸다는 겸재 정선(1676~1759)의 ‘골굴석굴도’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찾았다는 것이었다.
또 <수리 공사 보고서>는 공사 도중 석굴암 변소 문짝에서 찾아냈다는 ‘석굴암 중수 상동(량)문’도 근거자료로 제시했다. 1891년 석굴암 중수 내역을 기록한 상량문에서 기와건물의 흔적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자료를 바탕으로 석굴암 앞 기와집 공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가만 보면 기와건물을 먼저 배치해놓고 증거자료를 나중에 끼워맞춘 인상이 짙다.
■정선의 골불석불도, 그 정체
하지만 이번 학술회의에서도 지적했듯 석굴암 수리공사 후 고개를 갸웃거리는 연구자들이 속속 등장했다. 본격적으로 몰입해보자. 과연 지금처럼 석굴암에 기와집 형태를 갖춘 전실이 존재했던 것일까.
우선 석굴암 경내에서 발굴되었다는 유물(기와편)을 살펴보자. 일제의 수리공사 이전인 1910년대초에 찍은 사진을 보면 굴 위쪽에 기와 구조물이 보인다. <석굴암 수리공사보고서>는 이것을 석굴암 앞쪽에 조성된 기와건물의 존재를 알리는 방증자료로 보았다.
하지만 사진에서 보듯 이 기와건물은 석굴암 앞쪽이 아니라 본존불의 돔 위쪽에 조성한 것이다. 마치 석굴을 보호하는 기와건물처럼 보인다. 석굴암 앞 기와건물이 아니고….
그리고 석굴의 돔 위쪽에 조성된 기와구조물도 1891년 중수 때나 혹은 그 이후에 추가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또 정선의 ‘골굴석굴도’가 ‘기와건물을 갖춘 석굴암’의 증거로 삼을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왜냐면 경주에는 골굴암이라는 별도의 사찰과, 그 사찰에 속한 불상이 존재하고 있다. 최근에는 ‘골굴석굴도’가 ‘골굴암+석불’을 그린 것이라는 견해가 부각되고 있다. 그림의 배치도 실제 석굴암의 위치가 다르다. 옛 지도에서도 기와건물이 표시된 석굴암을 찾아볼 수 없다.
■석굴 코스프레
어떻게 그렇게 단정할 수가 있을까. 17~19세기 정시한(1625~1707), 이덕표(1664~1745), 임필대(1709~1773), 송달수(1808~1858)의 언급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석불은 사람의 노력으로 만든 것…석문(돌문) 밖 양쪽 가장자리에는 큰 바위에 불상 4~5위씩 새겨져…석문은 무지개처럼 다듬어져…굴 위에는 뚜껑 돌과 여러 돌이 올려져 있는데 바르고 깔끔하여 기울어지거나 흠이 있는 곳이 하나도 없다…”(정시한의 <산중일기>)
“석굴암에…다듬은 돌을 쌓아 동굴 모양으로 만들었으니 흙집(土宇)과 같고 좌우의 석면에 모두 불상을 새겨두었다…”(이덕표의 <우와집>)
“용마루나 처마 없이 돌로 쌓아 굴을 만들었다. 문설주와 문지방으로 막지 않고 돌로 문을 삼았다.”(임필대의 <유동도록>)
“돌로 방을 만들고 아래~위까지 돌로 층층이 둘렀으며 우산 같이 둥근 형상…밖에 흙을 쌓아 봉우리처럼 우뚝 솟았다.”(송달수의 <남유일기>)
먼저 선입견을 깨부숴야 한다. 17~19세기 답사객들은 ‘석굴암은 자연동굴이나 벽면을 파서 만든 암자가 아니’라고 이구동성하고 있다.
돌로 쌓은 다음 그 위에 흙을 덮어 마치 석굴처럼 조성했다고 언급했다. 한마디로 ‘석굴암은 굴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하나, 석굴암 앞 공간에 기와건물이 조성되어 있다고 묘사한 기행문은 없다.
여기서 신라인들의 불심을 가늠하게 된다. 즉 불교도들은 굴을 수행의 공간으로 즐겨 사용했다. 석가모니 붓다가 선정에 몰입해 있다가 깨어나 제석천에게 가르침을 주었다는 제석굴이 유명하다. 주지하다시피 인도나 중국에 수많은 석굴사원이 조성되어 있다.
반면 주로 단단한 화강암 지형으로 이뤄진 한반도에서 석굴을 파기는 현실적으로 매우 힘들다. 그랬기에 신라인들은 돌과 흙으로나마 석굴을 만들어 경배하고 수행했던 것이다. 시쳇말로 ‘석굴 코스프레’를 해서라도 불심을 표현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유교식 수리?
그리고 1960년대 석굴암 수리공사단이 ‘기와건물의 존재’ 방증자료로 거론한 1891년 ‘석굴암 중수 상동문’도 마찬가지다. ‘과거에 석굴암에 기와건물이 존재했었다’는 구절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석불의 구조만이 묘사되어 있다.
“…붉은 이끼 푸른 이끼가 낀 돌의 형세는 들쭉날쭉…주옥 같던 누전(樓殿)은 풀더미 우북한 마당에 묻혔으며….”
돌에 이끼가 끼고 퇴락했다는 구절이 있지만, 나무가 썩었다든지 하는 표현은 없다.
다만 “(이번 중수로)…용궁(龍宮·사원)의 제도가 거의 복구되었다”는 구절이 눈길을 끈다. ‘용궁의 제도’는 동양의 전통건축양식인 ‘상동하우(上棟下宇·위에 마룻대를 놓고 아래에 서까래를 드리우는 것)’을 가리킨다. 상동문은 “도끼질 하고 톱질하니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고 덧붙였다. 두 구절은 유교경전인 <시경>과 <주역>에서 따왔다.
그러니까 1891년의 중수는 유교의 건축관에 따라 석굴암 주실(본존불 공간)의 위에 기와시설을 추가하는 식으로 이뤄졌다는 의미가 된다.(최영성 한국전통문화대 교수)
■젖은 부처님
그런데 이번 학술호의에서 귀가 번쩍 뜨일만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소개됐다. (허형욱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18세기 경주 향교의 교임(향교 직원)인 이덕표(1664~1745)가 1704년(숙종30) 9월16일 석굴암을 답사한 뒤 남긴 글이다.
이덕표는 그때 늙은 스님이 했다는 이야기를 소개했다.
“…옛날에 석불에 구리기와(동와·銅瓦)를 덮었다. 그런데 어느날 석불이 절간 스님의 꿈에 나타났다. 석불은 ‘나는 본디 젖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하늘의 비와 이슬이 방울로 떨어져 나의 몸체를 씻고 영원(靈源)으로 흘러내려 그 혜택이 중생들에게 미치려하는데 어찌 이를 덮으려 하는가’라 했다. 잠에서 깬 스님이 그 기와를 벗겨냈다.”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백순우(1863~1942)의 <남유록>은 “과거 석굴암에서 천정수가 떨어지는 등 본래 내부에 습기가 있는 것이 정상인데, 일본인들의 파괴로 이끼 때문에 오염되니 애석하다”고 했다. 무슨 얘기인가. 석굴암은 본래 내부에 습기가 차 있어야 정상이라는 얘기가 아닌가.
그렇다면 일제강점기(콘크리트돔)와 1960년대(콘크리트 이중 돔)을 쌓고, 앞에 기와건물을 지어 외부습기를 철저히 막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늘의 비와 이슬로 중생의 몸체를 씻으려 했던 부처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한채 멋대로 손을 봤다는 얘기가 아닌가.
■일렬로 편 팔부중상
또하나 석굴암 수리와 관련한 논쟁이 남아있다.
과거 사료를 보면 석굴암은 본래 본존불을 안치한 건축물 한 곳으로만 되어있었을 가능성이 짙다.
기와건물의 존재는 언급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석굴암 양 옆에 호위하듯 늘어선 팔부중상은 무엇인가. 그냥 노천에 세워두었다는 것일까.
팔부중상(八部衆像)은 불교의 여덟 수호신(천, 용,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을 도상화한 조각상을 가리킨다.
이 팔부중상은 8세기 말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차윤정 불국사박물관 학예실장)
그런데 1910년 무렵 석굴암 수리 이전의 사진을 보라.
앞면에 보이는 금강역사상과 옆면에 조성된 팔부중상의 윗부분에서 처마의 역할을 하는 석재가 보인다. 노천에 설치된 석굴암 양 옆의 팔부중상과 금강역사상이 돌처마의 보호 아래 서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런데 이 팔부중상은 1960년대 수리·복원 과정에서 양옆에 1자로 펴놓았다.
그 이전에는 ┗과 ┛ 형태로 꺾여 있었다. 즉 밖에서 바라볼 때 왼쪽의 1~4상 중 4번째(아수라)와 오른쪽의 5~8상 중 8번째(가루라)가 안쪽으로 굴절되어 있었던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1~3상 및 5~7상과 달리 4상(아수라) 및 8상(가루라)은 규격도, 그림 형식도 다르다.
1~3과 5~7은 일직선에, 4와 8은 꺾인 부분에 배치했기 때문이란다. 4와 8의 규격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처마 끝에 맞추기 위해 폭을 줄였다는 설명이다.(강현 국립문화유산연구원 학예연구관)
석굴의 주실(본존불 공간)의 입구를 좁임으로써 참배객들이 특정 구역에 들어간다는 인식을 준 것은 아닐까. 그런데 1960년대 수리·복원에서 4상(아수라상)와 8(가루라상)을 일렬로 폈다.
당시 반대의견도 있었다. 당시 문화재위원이었던 김원룡(서울대교수)이 “확실치않은 근거를 들어 팔부중상을 일직선으로 펼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공사를 책임진 감독관 황수영(동국대 교수) 등이 일직선형을 고집했고, 그대로 관철시켰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고 ‘일제의 소행’ 등을 거론하며 팔부중상의 일렬 배치를 밀어붙인 인상이 짙다.아무래도 석굴암 앞에 기와건물을 세울 공간을 넓게 마련하기 위해 양쪽 4번째 팔부중상을 폈을 것이다.
■부실공사의 원조?
말이 나온 김에 석굴암의 신비를 더 살펴보자.
석굴암 본존불 머리 위의 천장에 연꽃 문양이 조각된 천개석(지름 2.5m)이 보인다. 원형 돔을 쌓은 다음 맨 마지막에 올려놓는 덮개돌이다.
그런데 이 천개석을 바라보면 균열선이 세 부분으로 나있음을 깨닫게 된다. ‘옥의 티’라고 하기엔 무시할 수 없는 흠결이다. <삼국유사> 석굴암 창건 설화에 그 이유가 나와있다.
“큰 돌 하나를 다듬어 천개석을 만드는데 돌이 갑자기 세 조각으로 갈라졌다. 김대성이 분하게 여기다가 어렴풋 졸았는데 밤중에 천신이 내려와 다 만들어놓고 돌아갔다….”(‘효선·대성효이세부모’조)
거두절미하고 김대성이 덮개돌을 다듬다가 그만 돌을 세 조각 냈는데, 모른채 하고 공사를 마무리했다는 얘기다. 김대성은 부실공사의 원조격이 아닌가.
이후 본존불의 갈라진 천개석을 바라보는 참배객들은 조마조마했을 것이다. 그와 함께 지금까지 1300년 가까이 무너지지 않은 모습을 부처의 영험으로 여기며 매우 신비스럽게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돔 구조물의 정상 부분에는 바깥으로 잡아당기는 인장력이 작용하지 않는다. 압축력만 나타난다. 그러니 쪼개진 모양이 불안정해보일지언정 그 조각이 실제 떨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또하나 앞서 밝혔듯 1960년대 수리공사 후 석굴암의 내부는 실내로 변형되어 어두컴컴해졌다. 석굴암 본존불이 굴 안 어두운 공간에 갇힌 격이다. 하지만 1910년대 사진을 보라.
실외에 노출된 석굴암은 그렇게 어두워 보이지 않는다. 로마의 판테온 실내와 석굴암 내부 공간의 바닥 조도(단위 면적이 단위 시간에 받는 빛의 양)을 비교해보면 어떨까. 석굴암의 바닥조도가 판테온보다 3배 이상 밝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촛불이나 혹은 조명 시설이 없는 석굴암은 암흑의 공간으로 여긴다. 대단한 착각이다. 그러나 이것이 현재의 석굴암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윤재신 이화여대 명예교수)
정리하자면 신라인들은 돌로 쌓고 흙으로 덮어 석굴 형태의 이른바 석굴암을 창건했다. 자연굴이나 인공굴 안에 조성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구조는 본존불을 안치한 이른바 으뜸방과, 그 본존불을 수호하는 팔부신장을 ┗과 ┛자로 배치했다. 그 앞엔 기와건물이 존재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이른바 본존불을 모신 원형 으뜸방(주실)과 입구를 가진 단일 공간으로 구성되며, ‘기와건물’(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강희정 교수)
그러니 지금처럼 ‘어둠 속에서 조명에 비친’ 석굴암 본존불은 원래의 모습이 아니다. 습기없이 뽀송뽀송한 부처가 아니라 하늘의 비와 이슬이 부처의 몸체를 씻고 영원(靈源)으로 흘러내려 그 혜택이 중생들에게 미치려 했던 것이 아닐까. 그것을 인간의 헛된 마음으로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원형을 잃어버린 석굴암을 대체 어찌해야 하는가. 머리를 맞댈 시기가 된 것 같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이 기사를 위해 강희정 서강대 동아연구소 교수, 강현 국립문화유산연구원 학예연구관, 윤재신 전 이화여대 교수, 우동선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허형욱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차윤정 불국사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최영성 한국전통문화대 교수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참고자료>
강희정·강현·허형욱·우동선·김봉렬·현승욱·홍성걸·이주형·하정민 외, ‘통일신라 불교미술과 건축의 정수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2025 APEC 경주 개최 기념 실크로드 인문학 국제학술회의 발표문), 계명대, 2025
윤재신, ‘석굴암의 신화 분석과 건축공간 복원에 관한 연구’, <건축역사연구> 32권 4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국립문화유산연구원, <석굴암, 그 사진>, 2020
최영성, ‘석굴암 석굴 중수 상량문 연구’, <보조사상> 47권 47호, 보조사상연구원, 2017
강희정, ‘명작의 탄생: 20세기 석굴암의 신화’, <미술사와 시각문화> 12권12호,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2013
문화재관리국, <석굴암수리공사보고서>, 1967
조철제, <경주의 조선시대 산책>, 학연문화사, 2023
강현, ‘건축고고학적 측면에서의 석굴암 원형 재검토’,(석굴암 석굴 원형 연구 학술대회 자료집), 2022
차윤정, ‘석굴암 팔부중상 연구: 양식 분석에 의한 조성 시기 재고‘, <미술사와 시각문화> 31권 31호,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2023
올해 마지막으로 열리는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에서 연 2.5%인 현 기준금리를 유지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수도권 집값이 안정됐다고 판단하기 이른 데다 최근 원·달러 환율이 1470원을 웃도는 등 환율 변동성이 커진 영향이다. 1450원을 넘는 고환율이 지속될 경우 물가 부담이 커질 수 있다.
한은 금통위는 오는 27일 회의를 열고 기준금리 인하 여부를 결정한다. 금통위는 지난 5월 기준금리를 연 2.75%에서 2.5%로 내린 이후 수도권 집값 오름세 등을 고려해 7월, 8월, 10월 세 차례 숨고르기를 했다. 이번에도 기준금리를 유지하기로 할 경우 네 차례 연속 동결이다.
시장에서 네 차례 연속 동결을 예상하는 배경엔 최근 가파르게 오른 원·달러 환율이 있다. 24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장보다 1.5원 오른 달러당 1477.1원에 주간거래를 마쳤다. 주간 종가 기준으로 2거래일 연속 1470원대를 기록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상호관세 부과 발표로 환율이 치솟았던 지난 4월 초 이후 7개월여 만에 가장 높다.
외환당국이 잇달아 구두로 외환시장에 개입했는데도 환율 오름세가 이어지고 있어 이번 회의에선 지난달보다 외환 부문에 대한 우려가 더 커질 수밖에 없는 분위기다. 박형중 우리은행 연구원은 “외환당국이 암묵적으로 1470~1480원을 환율 지지선으로 상정한 것으로 보이는데 한은이 이번에 기준금리를 인하하면 지지선이 뚫릴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특히 거주자의 해외 증권투자 증가, 연 200억달러의 대미 투자, 엔화 약세 등으로 1450원을 넘는 고환율이 당분간 이어질 경우 수입물가 상승으로 인한 물가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10월 금통위 의사록을 보면 한 금통위원은 “낮은 수요 압력, 국제유가 안정 등으로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목표치인 2% 부근에 머물고 있지만 높은 환율이 지속될 경우 (물가) 상승 압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박 연구원은 “해외자산을 가진 계층은 환율 상승으로 이득을 보기 때문에 물가가 올라도 감내 가능하지만 해외자산이 없는 저소득층은 조금의 물가 상승에도 상당한 충격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올해 세 차례 연속 기준금리 동결 배경이 된 수도권 집값도 동결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임재균 KB증권 연구원은 “10·15 부동산 대책 이후 서울의 주택 가격 상승세는 둔화됐지만 풍선효과로 경기 일부 지역의 가격 상승세가 나타나고 있다”며 “지난 20일 부동산원 발표에서 서울의 가격 상승세가 다시 가팔라진 점도 우려 요인”이라고 말했다.
한은이 내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지난 8월(1.6%)보다 올려잡을 것으로 예상되는 점도 금리 동결 요인으로 꼽힌다. 김지나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내년 성장률 전망치가 상향되면 잠재성장률에 준하는 수준에 도달하기 때문에 사실상 한은의 금리 인하 사이클(주기) 근거가 약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성남학교폭력변호사
서울탐정사무소
안산음주운전변호사
이혼상담
인터넷가입
수원강제추행변호사
폰테크
성남성범죄변호사
네이버 웹사이트 상위노출
남양주대형로펌
수원탐정사무소
웹사이트
안산학교폭력변호사
인천흥신소
수원변호사
흥신소
수원이혼전문변호사
용인법무법인
인터넷설치현금
네이버 사이트 상위노출
안산음주운전변호사
용인강간변호사
저신용장기렌트
수원강제추행변호사
성남학교폭력변호사
용인강간변호사
수원형사전문변호사
폰테크
수원강간변호사
분당강간변호사
의정부대형로펌
레플리카사이트
수원상간소송변호사
의정부형사전문변호사
인스타 좋아요
탐정사무소
김해이혼전문변호사
안양상간소송변호사
비아그라 종류
평택이혼전문변호사
웹사이트 상위노출
수원개인회생
수원성범죄전문변호사
흥신소
상간녀소송
수원형사변호사
분당불법촬영변호사
천안이혼전문변호사
수원불법촬영변호사
분당강제추행변호사
수원법무법인
수원상간변호사
용인불법촬영변호사
수원형사변호사
성남법무법인
비아그라 부작용
무심사장기렌트카
당일폰테크
평택학교폭력변호사
신차장기리스
인스타 팔로워 구매
폰테크
안양이혼변호사
수원성범죄전문변호사
인터넷티비현금많이주는곳
의정부검사출신변호사
청주센텀푸르지오자이
한게임머니상
의정부대형로펌
분당불법촬영변호사
인터넷가입현금지원
명품레플리카쇼핑몰
폰테크
용인검사출신변호사
양산이혼전문변호사
무심사장기렌트카
이혼전문변호사
이지렌터카
안양이혼전문변호사
이지렌트카
수원소년범죄변호사
용인성범죄전문변호사
양주학교폭력변호사
대전이혼전문변호사
한게임클래식머니상
수원법률사무소
성남이혼전문변호사
인터넷설치현금
의정부성범죄변호사
성남대형로펌
안양학교폭력변호사
남성진변호사
부천이혼전문변호사
폰테크
수원법무법인
안양법무법인
폰테크
분당강제추행변호사
수원음주운전변호사
김해이혼전문변호사
탐정사무소
성남상간소송변호사
이지렌트
수원이혼전문변호사
의정부이혼전문변호사
빠른이혼
폰테크
용인성추행변호사
의정부소년사건변호사
포항이혼전문변호사
광고대행사
수원법무법인
마약전문변호사
폰테크 사이트
성남이혼변호사
의정부형사전문변호사
인터넷가입
수원불법촬영변호사
포천학교폭력변호사
인스타그램 좋아요 늘리기
의정부학교폭력변호사
수원성범죄전문변호사
수원성범죄전문변호사
폰테크 홈페이지
이지렌트카
수원이혼전문변호사
성남대형로펌
폰테크당일
안양이혼변호사
폰테크
용인음주운전변호사
인터넷가입현금지원
인터넷가입현금지원
성남이혼전문변호사
수원검사출신변호사
신용불량장기렌트카
사이트 상위노출
폰테크후기
수원법률사무소
분당성추행변호사
폰테크당일
용인성범죄전문변호사
폰테크 당일
폰테크당일
폰테크
수원상간소송변호사
의정부법무법인
이지렌트
수원강제추행변호사
의정부성범죄변호사
수원형사변호사
의정부음주운전변호사
인터넷비교사이트
한게임머니상
분당성추행변호사
성남대형로펌
서울이혼전문변호사
의정부형사전문변호사
수원음주운전변호사
용인대형로펌
경주이혼전문변호사
의정부변호사
여자레플리카사이트
인터넷가입사은품많이주는곳
저신용장기렌트
수원성범죄전문변호사
의정부법률사무소
이혼전문변호사
성남성범죄변호사
수원강간변호사
서울폰테크
의정부이혼전문변호사
대구이혼전문변호사
의정부법률사무소
상조내구제
폰테크당일
용인법무법인
폰테크
양주학교폭력변호사
인터넷티비현금많이주는곳
의정부음주운전변호사
비아그라 사이트
명품레플리카쇼핑몰
수원성범죄변호사
한게임머니상
의정부법률사무소
안산이혼변호사
부산홈페이지제작
안양상간소송변호사
용인강간변호사
인터넷가입현금지원
세종이혼전문변호사
안양대형로펌
평택학교폭력변호사
용인음주운전변호사
용인성추행변호사
구미이혼전문변호사
수원형사전문변호사
이혼전문변호사추천
의정부이혼전문변호사
위례요양병원
경주이혼전문변호사
창원이혼전문변호사
당일폰테크
평택이혼전문변호사
위자료
사이트상위노출
폰테크
의정부형사전문변호사
비아그라 종류
상조내구제
레플리카사이트
분당강간변호사
의정부이혼변호사
수원대형로펌
의정부성범죄변호사
수원음주운전변호사
남양주학교폭력변호사
위자료
홈페이지 상위노출
안양이혼변호사
남양주대형로펌
의정부촉법소년변호사
사이트 상위노출
인터넷가입사은품많이주는곳
안양대형로펌
조정이혼
상간녀위자료
의정부법률사무소
수원상간소송변호사
사이트 상위노출
출장용접
폰테크당일
수원형사변호사
폰테크
인터넷가입
SNS마케팅
폰테크
중고화물차매매
분당성추행변호사
의정부성범죄변호사
사이트 상위노출
인터넷티비현금많이주는곳
수원상간소송변호사
의정부이혼변호사
인천탐정사무소
이지렌트
마약변호사
의정부성범죄변호사
남양주학교폭력변호사
내구제
분당강간변호사
안산이혼전문변호사
이혼전문변호사추천
수원이혼전문변호사
의정부이혼변호사
당일폰테크
수원이혼전문변호사
의정부음주운전변호사
분당불법촬영변호사
의정부학교폭력변호사
대구이혼전문변호사
안산이혼전문변호사
의정부변호사
성남이혼변호사
수원촉법소년변호사
의정부음주운전변호사
용인성추행변호사
수원상간녀변호사
포항이혼전문변호사
안양음주운전변호사
웹사이트 상위노출
경주이혼전문변호사
폰테크
분당성추행변호사
인터넷가입사은품많이주는곳
안양음주운전변호사
수원법무법인
의정부형사전문변호사
김해이혼전문변호사
비아그라 지속시간
의정부이혼변호사
의정부법률사무소
의정부성범죄변호사
저신용자렌트카
인천이혼전문변호사
안산학교폭력변호사
서울탐정사무소
수원성추행변호사
폰테크당일
대구두피문신
인터넷가입
수원강간변호사
수원부장검사출신변호사
평택학교폭력변호사
수원대형로펌
인천탐정사무소
포천학교폭력변호사
무심사무보증장기렌트
수원변호사
안양학교폭력변호사
이혼소송
수원리딩방사기변호사
폰테크
수원음주운전변호사
백링크
수원성범죄변호사
용인소년범죄변호사
한게임클래식
이혼상담
성남음주운전변호사
탐정사무소
안양학교폭력변호사
성남성범죄전문변호사
비대면 폰테크
정품비아그라
개인회생장기렌트카
의정부변호사
폰테크
폰테크
폰테크
마사지구인
의정부이혼변호사
수원법무법인
성남법무법인
남양주대형로펌
용인차장검사출신변호사
의정부부장검사출신변호사
안산학교폭력변호사
폰테크당일
용인불법촬영변호사
개인회생중장기렌트
분트
구리학교폭력변호사
폰테크 홈페이지
인터넷가입현금지원
용인성범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